이른 새벽 덕유산 정상 향적봉으로 운해가 밀려왔다. 바람이 빨리 지나간 뒤 향적봉 주변은 서리꽃으로 온통 하얗게 변했다. 무주=왕태석 선임기자 |
겨울이 오면 눈꽃으로 이름을 알리는 덕유산.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주 그곳을 찾았다. 곤도라를 타면 향적봉에 쉽게 오를 수 있어, 힘겨운 산행이 어려운 이들에게도 반가운 정상이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눈은 보이지 않고, 정상은 텅 빈 듯 황량했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다시 올랐지만, 거센 바람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일출이 열릴 동쪽에는 먹구름만 가득해,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 갔다.
이른 새벽 덕유산 정상 향적봉으로 운해가 밀려왔다. 바람이 빨리 지나간 뒤 향적봉 주변은 서리꽃으로 온통 하얗게 변했다. 무주=왕태석 선임기자 |
돌아서려던 순간, 서쪽 하늘이 나를 멈춰 세웠다. 달이 진 자리로 운해가 밀려왔다. 바람이 빨라지자 낮게 깔린 구름이 속도를 더했고, 마치 용이 몸을 솟구치는 듯했다. 이내 향적봉을 완전히 뒤덮으며 앞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구름이 걷히자 숨이 멎었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 서리가 수북이 내려앉은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때 알았다. 겨울바람이 지나간 시간이, 서리라는 흔적으로 남았다는 것을.
이른 새벽 덕유산 정상 향적봉으로 운해가 밀려왔다. 바람이 빨리 지나간 뒤 향적봉 주변은 서리꽃으로 온통 하얗게 변했다. 무주=왕태석 선임기자 |
곧 한 해가 저문다. 어떻게 흘러갔는지 흐릿하지만, 바람과 서리가 흔적을 남기듯 우리의 시간도 분명 어딘가에 새겨진다. 사람들의 작은 발자국이 모여 역사가 되고, 내 자취 또한 그 안에 보탬이 된다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서리꽃 위에서 나는 잠시 멈춰 묻는다.
올해, 나는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이른 새벽 덕유산 정상 향적봉으로 운해가 밀려왔다. 바람이 빨리 지나간 뒤 향적봉 주변은 서리꽃으로 온통 하얗게 변했다. 무주=왕태석 선임기자 |
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