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녹색이 있다는 것을 크라바트는 그전까지 알지 못했다. 파릇파릇한 풀밭의 녹색, 자작나무의 녹색, 버들잎의 녹색,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이끼의 녹색. 이끼의 녹색에는 파란빛마저 감돌았다.’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크라바트’ 중
김은한 연극배우·극작가 |
어린 시절 이 문장을 만나고 깜짝 놀랐다. 사랑을 표현하는 탁월한 문장이라고 여겼다. 다양한 녹색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익숙한 풍경이 다채롭게 빛난다. 어쩌면 발견이 아니라 발명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알아보고 싶고,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만나고 싶다. 살다 보니 사랑뿐 아니라 배움과 경험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보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저 사랑의 문장은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나고 보니 돌이켜지는 일도 있다. 어떤 사랑이, 어떤 시절이 지나면 사람은 다시 삭막해지곤 한다. 무언가에 놀라거나 감탄하는 일이 줄어든다.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취향과 감각이 의심스럽다. 누굴 사랑했지? 무얼 좋아했지? 삶과 나와 당신을 대접하는 방식이 박하고 매정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명 있었다, 그런 순간이. 한 해를 마무리하며 마음 한구석에서 저 문장을 떠올린다. 색채를 발견하는 기쁜 순간이 오기를 기대한다.
김은한 연극배우·극작가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