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
한국무역협회(KITA)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반도체를 제외한 자동차·기계·철강·화학공업 등 4대 산업에서 중국은 이미 한국과 일본을 앞질렀다. 반도체 이 '하나'에 국가 산업의 명운을 모두 걸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거센 추격을 체감한 기업들이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낡은 잣대였다. 운동복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예전 한복 있지 않으냐"고 한다. 팔은 끼이고, 바지는 짧다. 달리기엔 도저히 맞지 않는 옷이다. 기업은 뛰려 하는데, 정부는 여전히 걸으라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오픈AI 샘 올트먼 대표를 만난 뒤 "AI와 반도체는 국가 명운이 걸린 전략산업"이라며 금산분리 규제 완화 검토를 지시했다.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할 공공 투자기관 설립도 주문했다. 그러나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SK하이닉스를 위한 특혜"라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손정의 흉내를 내지 말라"고 직격했다. 정작 반도체특별법에서는 업계가 그토록 요구해온 '주 52시간제' 예외조항이 빠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런 기류를 의식한 듯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금산분리 완화가 아니라 대규모 AI 투자를 가능하게 할 방법론"이라며 "각국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속도로 경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이례적으로 홈페이지에 장문의 '대국민 설명문'을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SK하이닉스 밑에 특수목적회사(SPC) 설치는 금융업 진출이 아니라 대규모 설비투자를 위한 한시적 구조이며, 금산분리 훼손과는 무관하다는 설명이다.
'대기업 특혜'라는 낡은 프레임, '금산분리 교조주의'에 발이 묶인 사이 산업의 시계는 멈춰 섰다. 미국은 5년간 390억달러의 보조금을 쏟아붓고, 일본은 TSMC 구마모토공장 건설비용의 40%를 직접 지원한다. 반면 우리는 1980년대식 규제를 붙든 채 말싸움만 반복한다.
반도체 공장 한 기를 짓는 데 드는 비용은 이제 120조원에서 많게는 150조원 수준이 됐다. 대통령 공약인 국민성장펀드 150조원을 전액 투입해도 첨단 반도체 공장 한 기 짓기에도 빠듯하다. 반도체 업계에 배정된 국민성장펀드 자금은 20조9000억원이지만, 이 가운데 70%는 대출이다. 직접투자는 1조6000억원에 그친다. 대출이 늘면 부채비율은 치솟고, 신용등급 부담이 뒤따른다. 기업으로서는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구조인데도 이 또한 눈치를 봐야 한다. 정부는 손자회사가 증손회사를 설립할 때 지분 50%만 확보해도 되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SPC를 활용한 프로젝트 투자 구조도 허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업계의 반응은 차갑다. "액수도, 구조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도체에 배정된 자금 규모로는 글로벌 '쩐의 전쟁'을 치르기엔 역부족이라는 판단이다.
실제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 1호 공장의 클린룸 공사에만 25조원이 들어간다. 4개 공장을 모두 완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600조원. 여기에 청주 공장 투자 46조원이 더해진다. 그러나 회사의 순현금은 3조8000억원에 불과하다. 반도체 2강의 문턱에서 발목을 잡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자금이다. 최태원 회장이 "요즘 제일 큰 고민은 돈"이라고 토로한 이유다.
정치권은 여전히 '숟가락 얹기'에 분주하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용인 클러스터를 새만금으로 옮기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실제 '반도체클러스터 새만금유치추진위원회'도 꾸려졌다.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사업은 멈춘다. 최근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의 말이 서늘하다. "우리가 못하면, 누군가는 그 시장을 가져갑니다. 그러면 그땐 정말 늦습니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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