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 자동화 라인. (사진=시즐 제공) |
“쾅, 쾅.”
기름때 묻은 30년 된 프레스 기계가 굉음을 낸다. 하루 종일 쇳덩이를 찍어내지만 이 설비가 오늘 몇 개를 만들었는지, 어디가 아픈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업자가 수첩에 ‘바를 정(正)’자를 그려가며 세야 겨우 파악되는 ‘깜깜이’ 현장. 대한민국 뿌리산업의 민낯이다.
그런데 이 투박한 기계에 손바닥만 한 단말기를 붙였더니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 1000개째 생산 돌파했습니다.” “30초 뒤에 불량이 날 것 같으니 멈추세요.” 낡은 기계가 작업자에게 말을 건다. 수천만원짜리 최신 설비가 아니다. 고물에 가까운 기계의 ‘뇌’만 살짝 바꿨을 뿐인데 최첨단 스마트 공장으로 변신했다. 죽어가는 공장에 인공지능(AI) 호흡기를 달아주는 기업, ‘시즐(SIZL)’ 이야기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흑자’는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보다 보기 힘든 희귀 동물이다. “계획된 적자”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몸집만 불리는 곳이 태반이다. 시즐은 이 공식을 보란 듯이 깼다. 돈을 번다. 그것도 잘 번다. 2024년 매출 271억원, 영업이익 15억원을 찍었다. 올해는 더 가파르다. 3분기 만에 영업이익 33억원을 남겼다.
투자 혹한기? 시즐에겐 딴 세상 얘기다. 지난 1월 237억원 규모 시리즈C 투자를 유치했다. 벤처캐피털(VC)들이 지갑을 닫는 시기에 수백억원을 끌어모은 건 숫자가 증명하는 확실한 ‘실탄’ 덕분이다.
“새 기계 사지 마세요” 현장에서 찾은 답
제조 AI 컨설턴트 솔루션을 활용하여 AI에게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화면. (사진=시즐 제공) |
비결이 뭘까. 이지현 시즐 대표는 “안 되는 걸 되게 만드는 현장성”을 꼽는다. 영국 볼튼대 경영학과를 나온 이 대표는 10년 넘게 스마트팩토리 바닥을 굴렀다. 거친 제조 현장에서 30대 여성 창업가로 살아남은 건 오직 ‘실력’이었다. 그는 공장 사장님들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꿰뚫었다. “비싼 새 기계 사라는 말은 먹히지 않는다. 있는 기계 고쳐 쓰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게 ‘레트로핏(Retrofit)’이다. 기계 뼈대는 두고 컨트롤러(두뇌)만 교체한다. 여기에 시즐의 필살기인 ‘에이전틱(Agentic) AI’를 붙였다. 보통 스마트공장 구축에 수개월이 걸리지만 시즐은 2주면 끝낸다. 엑셀 파일 하나만 던져줘도 자체 개발한 ‘표준 스키마’가 알아서 데이터를 분석해 1주일 만에 AI 코파일럿을 가동한다. 비용은 기존 컨설팅의 10분의 1 수준. 가성비에 목숨 거는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줄을 서는 이유다.
사장님이 영업사원…5TB 데이터의 장벽
이지현 시즐 대표. (사진=시즐 제공) |
마케팅 팀이 따로 필요 없다. 써본 사장님이 다른 사장님 손을 잡고 온다. 실제로 한 금속 가공업체에서 불량률이 32% 뚝 떨어지자 6개월 만에 주변 공장 15곳이 시즐을 도입했다. 이렇게 모은 고객사가 200여곳, 확보한 데이터만 5TB(테라바이트)가 넘는다. 이 데이터가 핵심 해자(Moat)다. 경쟁사가 지금 시작해 이 정도 데이터를 모으려면 꼬박 9년이 걸린다. 돈으로도 시간을 살 순 없다.
물론 장밋빛 미래만 있는 건 아니다. 넘어야 할 산도 있다. 우선 ‘확장성’ 증명이다. 시즐은 2026년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프레스 공정을 넘어 스마트시티, 스마트팜 등 타 산업군에서도 시즐의 AI가 통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베트남 등 글로벌 시장 안착도 당면 과제다. 단순한 공장 구축 회사가 아닌, AI 플랫폼 기업으로서의 가치를 시장에 납득시키는 과정이 남아있다.
중기부 주관 제1회 제조 AI솔루션 피칭데이 SIZL 대상 수상. (사진=시즐 제공) |
이 대표는 “K팝, K뷰티 다음 타자는 ‘K제조 AI’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쇠 깎는 소리 요란한 공장 한구석에서 조용히 피어난 AI 혁명. 시즐이 보여주는 숫자는 지금 제조업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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