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의 전략적 재정렬형 기업가정신
위기의 초입에서 기업은 숫자를 말한다. 매출과 이익, 차입금과 현금흐름 같은 지표들이 회의실을 채운다. 그러나 위기가 길어질수록 리더가 붙잡는 언어는 달라진다. 숫자가 아니라 정체성과 방향이다. 올해 롯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가 ‘브랜드’였다는 점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12월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2025 롯데 디자인전략회의’에 그룹 수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장면은 상징적이다. 디자인 회의에 회장이 참석하는 일은 흔치 않다. 더 이례적인 것은 이 회의가 ‘미학’이 아니라 ‘전략’의 언어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롯데는 왜 지금 브랜드를 말하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롯데는 무엇으로 다시 경쟁하려 하는가.
디자인 회의가 전략 회의가 되다
12월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2025 롯데 디자인전략회의’에 그룹 수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장면은 상징적이다. 디자인 회의에 회장이 참석하는 일은 흔치 않다. 더 이례적인 것은 이 회의가 ‘미학’이 아니라 ‘전략’의 언어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롯데는 왜 지금 브랜드를 말하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롯데는 무엇으로 다시 경쟁하려 하는가.
디자인 회의가 전략 회의가 되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브랜드 연속성(Brand Continuum)’이었다. 공급자중심이 아니라 고객 경험을 기준으로 브랜드를 재정의하고, 고객이 실제로 체감하는 접점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메시지가 분명히 제시됐다. 그룹 CI 가이드라인 2.0, 이른바 ‘햇님 마크’를 활용한 헤리티지 IP 전략, 그룹 정체성에서 영감을 받은 시그니처 향 개발 사례까지 회의장은 일종의 브랜드 전략 전시장에 가까웠다.
이 장면을 단순한 이미지 쇄신으로 해석하면 본질을 놓친다. 롯데가 말한 브랜드는 광고나 포장의 문제가 아니다. 관리 가능한 경영 자산으로서의 브랜드다. 확장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존속을 위한 질서라는 점에서 그렇다. 브랜드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롯데의 현재 위치를 보여준다.
위기를 인정한 리더의 언어
이 선택은 돌발적인 선언이 아니다. 배경은 이미 7월 사장단회의에서 드러났다. 롯데는 올해 처음으로 1박 2일 사장단회의를 열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2024년 말 유동성 위기설 이후 인적 교체와 비주력 계열사 매각이 이어졌지만, 그룹이 정상 궤도에 복귀했다고 말하기엔 이르다는 판단이 공유됐다. 신동빈 회장이 ‘그룹 역사상 가장 힘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것도 수사가 아니라 현실 인식의 언어였다.
그는 정치·경제·사회·기술 요소를 종합해 경영 환경을 읽는 관점을 강조하며 CEO들에게 5년과 10년 뒤를 동시에 보라고 주문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말은, 현 국면을 단기 침체가 아닌 구조적 전환기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화학군에는 체질 개선을, 식품군에는 핵심 제품의 브랜드 강화를, 유통군에는 고객 중심 재설계를 요구했다. 이때부터 브랜드는 마케팅의 언어가 아니라 경영의 언어가 되기 시작했다.
브랜드를 다시 꺼내다
롯데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중국 진출의 좌절, 온라인 전환의 지연, 석유화학 업황 악화라는 세 가지 구조적 난제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이는 개별 판단의 오류라기보다, 성장기 전략이 전환기 전략으로 넘어오며 치른 비용에 가깝다.
더 이상 규모와 물량만으로 경쟁하기 어려운 국면에서 기업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축은 정체성이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반복됐다. IBM은 하드웨어 경쟁에서 밀렸을 때 스스로를 ‘솔루션 기업’으로 재정의했고, 유니레버는 수백 개 브랜드를 정리해 핵심에 집중했다.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의 말처럼, 전략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브랜드 전략도 다르지 않다.
전략적 재정렬형 기업가정신(Strategic Reconfiguration Entrepreneurship)
신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공격적 확장과 거리가 있다. 대신 실패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며 구조를 정리하는 방식에 가깝다. 일본 롯데와의 분리, 지배구조 개편, 화학·바이오 재편, 그리고 브랜드 재정비까지. 이는 ‘빠른 기업가정신’이 아니라 전환기 대기업에 요구되는 관리형 기업가정신이다.
고전 『순자』에는 “흐르는 물을 보면 그 땅의 형세를 안다”는 말이 있다. 기업가정신도 마찬가지다. 가장 화려할 때가 아니라, 어려울 때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남기는지에서 그 성격이 드러난다. 브랜드는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온라인 전략, 제품 경쟁력, 조직의 속도, 인사 체계, 인공지능 활용까지 함께 바뀌지 않으면 장식에 그친다.
그래서 이번 선택은 결론이 아니라 시험대다. 브랜드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위기가 극복되지는 않는다. 브랜드를 중심으로 사업의 우선순위를 재배치하고, 실행의 속도를 바꾸며, 성과로 증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제 롯데 앞에 남은 질문은 하나다. 더 크게 가는 기업이 아니라, 다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이 될 수 있는가. 답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에서 나온다.
[그래픽=노트북LM] |
아주경제=기원상 컬럼니스트
- Copyright ⓒ [아주경제 ajunews.com] 무단전재 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