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재정 상황이 본격적인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2026년 예산안을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이 재점화되면서 독일과의 국채 장기 금리는 올해 10월 기준 9개월 만에 최대치로 벌어졌고, 유럽 금융시장에는 ‘프랑스 리스크 프리미엄(France Risk Premium)’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사실 프랑스의 위기는 지난 9월 블룸버그가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대신해 유럽 재정난의 대표 주자가 됐다’고 보도했을 무렵부터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실제로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이미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지난 10월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프랑스 국가 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절했고, 한 달 전인 9월에는 또 다른 신용평가사 피치가 프랑스 신용등급을 기존의 AA-에서 한국보다 낮은 A+로 낮췄다. 심지어 에리크 롱바르 프랑스 재무 장관이 올해 10월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조만간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프랑스가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로 주 35시간제를 꼽을 수 있다. 사회당 주도로 2000년부터 본격 시행된 주 35시간제 도입의 주요 목적은 당시 10%를 웃돌던 만성적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주 35시간제 도입 찬성파들은 기존 근로자의 근로 시간을 줄이면 인력난에 처한 기업이 새로 인력을 채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본격 도입된 지 5년 뒤인 2005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주 35시간 근로제는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노동시장 개혁 조치”라고 꼬집었을 정도로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기업들이 생산시설 해외 이전이나 기술 혁신 등 다양한 비용 절감 방안을 도입하면서 기대했던 수준만큼 고용 창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부작용은 두드러졌다. 근로 시간이 기존의 주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최저임금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지원책을 펼쳤다. 기업 역시 강성 노조의 반발이 두려워 임금을 삭감하지 못했다. 그 결과 ‘노동 시간이 줄어도 임금은 줄어선 안 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재정 적자는 차곡차곡 늘어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부채는 금융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는 팬데믹 당시 경기 부양과 실업자 보조를 위해 무제한 지출 기조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2020년 프랑스의 재정 적자는 GDP 대비 약 9%로, EU의 안전·성장 협약 기준(GDP 대비 3% 이내 유지)을 크게 웃도는 상황까지 늘어났지만, 보조금에 맛을 들인 국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이미 늘려버린 지출을 좀처럼 다시 줄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요즘 프랑스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인식마저 생겨나고 있다. 프랑스의 실업급여는 연령과 근속 기간에 따라 최대 27개월까지 지급되며, 지급액은 직전 임금의 약 60% 수준을 기본으로 하되 상한 기준으로는 70% 안팎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데일리 메일은 “일부 프랑스 인플루언서들은 자국의 Z세대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한(incredibly generous) 실업 급여에 기대 살 수 있도록 해고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한 인플루언서가 해고되기 위해 ‘항상 지각할 것, 비전문적이고 비자발적으로 일할 것, 최악의 동료가 될 것, (당신의) 해고를 논의하는 미팅에조차 참석하지 말 것’이라고 충고한 동영상은 14만4000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국가와 국민들이 이렇듯 단체로 재정 중독에 빠져 있는 사이, 나라 경제는 급속히 나빠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 GDP 대비 50%대 수준이었던 프랑스 국가 부채는 올해 1분기 114.1%까지 치솟았다. 작년 재정 적자 비율 역시 GDP 대비 5.8%로, EU가 권장한 GDP 대비 3% 이내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뒤늦게 위기를 감지한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가 총리직을 내걸고 연금 삭감과 공휴일 축소 등 고강도 긴축안을 내세웠지만, 국민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 의회 신임투표에서 패배하며 올해 9월 취임 9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이에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새 프랑스 총리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전임 바이루 총리가 추진했던 공휴일 이틀 축소안을 전격 철회하기로 했지만, 프랑스 전역에선 긴축 재정안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고, 마침내 학교와 병원 등 국가 주요 인프라가 멈추는 국가 마비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근무 시간을 연장할 수도, 그렇다고 복지를 축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1억유로(약 1745억원) 이상 자산에 대해 2% 세율을 적용하는 이른바 ‘부유세’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좌파 정치인들은 “긴축 재정안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부자를 살찌우려는 신자유주의 음모”라며 부유세 도입을 정당화했고, 대중은 이에 화답하듯 “부자들에게 세금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왔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만지작거리는 부유세라는 카드조차도 도입이 수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유세 도입의 선봉에 선 가브리엘 주크만 파리 경제대 교수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주크만 세(稅)’라 불리는 부유세로 인해 최대 200억 유로의 세수 확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경제학자들은 부유세에 반발한 부자들이 해외로 자산을 이전하면 실제 세수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며 맞서고 있다. 실제로 유럽 최고 부자이자 세계 최대 명품 그룹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부터 “부유세는 투자 위축과 고용 악화를 야기하고 프랑스 기업의 경쟁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프랑스의 현재가 대한민국의 내일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지난 5월 우리나라 중앙정부 채무는 사상 처음으로 1200조원을 넘어섰다. 기획재정부 장기 재정전망에 따르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올해 49.1%에서 2045년 97.4%로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각종 선심성 현금 살포 전략을 취하는 동시에 주 4.5일제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미래를 결정할 중대한 시험대에 서 있다. 포퓰리즘과 재정 중독에 도취돼 있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앉아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가 겪는 혼란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향해 던지는 경고장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오윤희 국제부장(oyoun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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