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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문학사에 대한 치밀한 연구,  '앎과 무지'의 경계 흐려[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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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문학사에 대한 치밀한 연구,  '앎과 무지'의 경계 흐려[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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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 "'로저비비에' 윤석열·김건희 뇌물 혐의 경찰서 추가수사"
[제66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장성규 '문학의 민주주의'


문학의 민주주의·장성규 지음·역락 발행·488쪽·3만8,000원

문학의 민주주의·장성규 지음·역락 발행·488쪽·3만8,000원


올해 학술 분야 본심작들의 두드러진 경향은 민주주의에 대해 또렷한 관심을 내보인다는 점이다.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다양한 주체와 장소, 미디어, 제도화된 민주주의에서 쉽게 누락되는 소수자 정치를 다룬 책들이 많았다. 다만 서구이론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언급됐다.

가장 심도 있게 논의된 책은 두 권이다. 김명희의 '다시 쓰는 자살론'은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현대적인 독해를 통해 한국사회의 자살이 지닌 정치적 성격을 진단한다. 분석되는 것은 국가폭력이나 사회적 참사를 경험한 이들, 사회적 소수자로 간주되는 이들의 자살이다. 이 책은 방대한 보고서와 인터뷰 자료를 토대로 자살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분석하면서도 이를 통계나 의료, 정책의 언어로 섣불리 환원하지 않는다. 소수자의 자살 '과정'에 집중함으로써 마침내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에 다다르도록 설계된 이 책의 노련한 구성과 방법론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수상작인 장성규의 '문학의 민주주의'는 글을 모르거나 문학교육을 받은 적 없는 노동자 민중의 책 읽기와 글쓰기에 주목한다. 특히 1988년부터 2006년까지 지속된 구로노동자문학회의 활동을 치밀하게 밝혀낸 점은 '아래로부터의 문학사' 서술을 한층 풍성하게 한다. 당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각종 매체와 수기, 구로노동자문학회 참여자들의 구술자료를 폭넓게 검토한 이 책은 '노동자는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읽었는가'에 대한 답을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인다. 덕분에 독자는 문학과 비문학, 정독과 오독, 앎과 무지, 새로운 것과 진부한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가 흐려지고 뒤집히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제도교육 경험 유무, 문학지식 습득 여부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읽고 써온 이들의 경험을 고유의 문학적 역량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문학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에 값한다. 문해력이 그저 기득권이 되기 위한 도구적 자원으로 여겨지는 요즘 곱씹어볼 노작이다.

오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