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학과 유럽의 예술 연결
애절한 드라마 품은 목소리에 심취
‘별’ 되어 그(곳)를 향한 여정
내년 3월8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공연
애절한 드라마 품은 목소리에 심취
‘별’ 되어 그(곳)를 향한 여정
내년 3월8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공연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조선사 최대 미스터리 장영실의 사라진 행적을 상상력으로 풀이한 팩션극이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장영실과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세종. 600년의 세월이 흘러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두 남자와 이들의 추적을 쫓는 수상한 그림자. 조선사 최대 미스터리로 남은 이들의 행적을 파헤친다.
조선의 하늘 문을 열었지만, 실록에서 사라진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이야기는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로 인해 2025년 소환됐다. 작품은 이상훈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충무아트센터 개관 20주년 공연이자 EMK뮤지컬컴퍼니(이하 EMK)의 열 번째 창작 뮤지컬로 지난 2일 첫선을 보였다.
조선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장영실의 마지막 행적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1인 2역 극으로 풀어낸다. 조선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1442년 이후 자취를 감춘 장영실의 발자취를 따라나선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로부터 시작돼, 과거와 현재 그리고 조선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상징적 인물을 탐색한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국내 대형 제작사 EMK가 처음 시도한 조선인의 서사극에 초호화 제작진과 배우들이 대거 합류했다는 소식에 개막 전부터 화제를 불렀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유독 ‘한복 입은 남자’만 관객들의 반응이 정반대로 갈린다. 상상력으로 풀어낸 소재가 더 짙은 뭉클함을 불러왔다며 팩션 뮤지컬의 센세이션한 활약에 주목했다. 반면, 한정된 시간과 무대에서 많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한 욕심과 공들인 연출에 비해 익숙한 넘버 전개와 세트 구성, 구분 없는 앙상블과 개연성 부족 등으로 극의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도마 위에 오른 ‘한복 입은 남자’. 다수는 스토리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다며 관람 전 원작 소설을 반드시 읽으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예술을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독서 단계를 건너뛰고 공연장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배우들이 극을 살리는 힘이 가장 크지만, 혹평으로 난도질할 정도의 비극적인 파멸 극은 아니다. 극 중 곳곳에 숨은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기에 ‘뮤덕의 힘’을 살짝 빼고 편안하게 작품을 받아들인다면 작품이 품은 ‘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조선의 하늘을 찾고 싶었던 세종과 그 문을 열어낸 영실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여백을 채운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 여백의 미학에서 펼쳐지는 대담한 상상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바로크 시대의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1983년 영국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처음 공개 당시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화풍과 다른 드로잉 기법으로만 완성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동시에 작품 속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했고, 그림 한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배 한척에서 상상력이 총동원됐다.
상징적인 요소를 통해 바다를 건너온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617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조선 전기의 옷을 입은 그의 정체는 누구일까.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그림의 남자가 조선에서 사라진 장영실은 아니냐는 역사적 진실의 빈틈에서 그림의 여백을 채운다.
장영실이 명나라 장군이자 환관인 정화의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났다는 상상을 해본다. 다 빈치의 날틀과 로켓, 조선의 비차와 신기전이 겹친다는 점에서 묘한 데자뷔를 느낀다. 허구가 아니라 진짜 두 인물이 만났다면 가능했을 조선과 르네상스의 만남이다.
다시 돌아가서 ‘한복 입은 남자’는 팩션 뮤지컬이다. 작품의 소재를 역사 왜곡, 외교 분란 등으로 치우친다면 관람의 핵심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종교화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에 풍경화의 등장도 솔깃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잊힌 진실을 찾아 나서기 위한 또 하나의 탐험이 근거 있는 상상을 불러온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비망록을 통해 과거 영실의 발자취를 따라 나선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 무대 위 시간은 ‘배우’ 목소리에 따라 걷는다
‘한복 입은 남자’를 이야기할 때 배우들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최정상급 배우들이 한무대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출연 소식에 개막 전부터 ‘피켓팅’ 전쟁은 시작됐고, 올겨울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모든 배우는 극 중 1인 2역을 소화한다. 조선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의 세계 속 ‘영실/강배’ 역 신성록·전동석·고은성, ‘세종/진석’ 역 카이(본명 정기열)·박은태·이규형이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초대한다.
치열한 예매 열전을 배우들의 막강 팬덤으로만 단정할 수 없다. 연령층을 어디에 맞춰야 하냐는 질문도 다수 접수되는데,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다. 대본 본연의 대사와 노련한 애드리브가 장면의 퍼즐을 쉽고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동시해 웃음보를 빵빵 터뜨리는 재미도 더한다. 특히 1인 2역의 온도 차가 크니 이 또한 킬링 포인트다.
배우들이 쌓아온 지난 무대들이 모두 담겨있다. 깊이 있게 캐릭터를 흡수한 진심이 심금을 울린다. 조선의 하늘을 찾고 싶은 세종의 꿈을 장영실이 현실로 이뤄내는 서사를 무대에 그대로 녹였다.
무엇보다 시시각각 변신하는 역할을 단단한 목소리로 공연장을 채운다. 감미로움에 또렷한 딕션과 애절한 드라마를 품은 목소리는 뭉클해진 심장을 터뜨린다. 폭발적인 발성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꿈을 좇는 모든 이의 별에게 소망을 비는 우리의 삶을 대변한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 내가 바라는 ‘별’은 무엇인가
‘한복 입은 남자’는 대사에서 자주 언급되듯 ‘별’에서 시작해 ‘별’로 끝난다. 이는 영실과 세종 두 인물에 대한 서사를 넘어 꿈을 그리는 자들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단순한 군신 관계를 뛰어넘어 깊은 연대를 가진 영실과 세종이 바라보는 하늘의 별은 단순히 닿고 싶은 존재만은 아니다. 이들이 함께 살아 숨 쉰 모든 이의 염원이 담겨있다. 각자의 별이 무엇인지 서로 속삭인다.
이들을 비추고 있는 별은 소망을 비는 별별이었다가 숲의 어두움을 밝히는 반딧불로 변한다. 때론 밤하늘에 바다를 그리는 은하수로 장관을 이루고, 혹성탈출 급으로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다. 그리워 흘린 눈물은 서로 연결돼 밤하늘에서 비차(글라이더)·자격루(물시계)·간의(별의 위치 측정기)·혼천의(천문 관측기)를 별자리로 수놓는다.
작품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빛날 별’을 이야기한다. 무엇이든 원하는 그 순간을 상상하라. 떨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을 보며 다시 만날 날에 대한 희망, 나아가 현재 바라는 꿈과 이상이 닿을 미래를 기대하며 기원한다.
하늘의 문이 열려 두 시대가 맞닿은 ‘한복 입은 남자’는 내년 3월8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기사제보 news@sportsseoul.com]
Copyright ⓒ 스포츠서울&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