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존 F 케네디 기념 공연예술센터에서 작업자들이 건물 외벽에 새겨진 센터 이름을 ‘도널드 J 트럼프-존 F 케네디 기념 공연예술센터’로 바꾸고 있다. AP=연합뉴스 |
미국 수도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공연장 ‘케네디센터’ 명칭을 ‘트럼프-케네디 센터’로 바꾸기로 한 결정이 보수-진보 진영 간 문화전쟁으로 확전하는 양상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 24일(현지시간) 케네디센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재즈 콘서트를 진행자가 보이콧했다. 앞서 뮤지컬 ‘해밀턴’ 제작진이 공연 거부를 결정하는 등 트럼프-케네디 센터로의 명칭 변경에 반발해 취소된 행사만 10여 개다.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위시한 보수 진영에서는 ‘트럼프 증후군’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냉소적 반응을 보인 반면 진보 진영에선 “권력의 통제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라고 두둔하고 있다.
케네디센터는 이날 오후 홈페이지를 통해 ‘크리스마스 이브 재즈 잼’ 공연이 취소됐다고 알렸다. 주최 쪽 진행자인 재즈 드러머 척 레드(67)는 2006년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네디센터 무대에 올랐는데, 최근 센터 이사회가 명칭을 ‘도널드 J 트럼프-존 F 케네디 기념 공연예술센터’로 변경하기로 의결하자 이번 공연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레드는 “케네디센터 웹사이트에서 명칭 변경을 확인한 지 몇 시간 뒤 건물 외벽에서도 바뀐 이름을 보고 공연 취소를 결정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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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영 “공연 취소, 좌파 편협함 증명”
보수 진영에서는 “전형적인 트럼프 증후군”이라고 몰아세웠다. ‘나는 마가다’라는 닉네임의 온라인 인플루언서 등 보수 성향 온라인 이용자들은 “척 레드가 공연을 막판에 취소한 건 좌파가 얼마나 편협한지 증명할 뿐” “트럼프 증후군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증후군은 트럼프 대통령 관련 사안에 이성을 잃고 무조건 반대하는 병적 반응을 보인다는 의미로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공격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반면 진보 진영에서는 척 레드의 결정을 “양심적 행동”이라고 평가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적 결정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증후군’으로 치부한다고 반발한다. ‘카멀라 해리스를 지켜내라’는 닉네임의 온라인 인플루언서는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글을 통해 “척 레드는 트럼프가 역사적인 공연장 명칭을 바꾸는 모욕적 조처를 취한 이후 행사를 취소했다. 트럼프에 맞서 싸운 레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리트윗해 달라”고 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케네디센터 앞에서 명칭 변경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트럼프는 존 F 케네디가 아니다’고 적힌 펼침막을 들어보이며 집회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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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진영 “트럼프에 맞서 싸워 감사”
이번 사태는 케네디센터 명칭 변경 후 벌어지고 있는 공연계 반발 중 하나다. 뮤지컬 ‘해밀턴’의 작가와 배우 등 제작진은 센터 공연을 취소했고 미국 3대 무용단으로 꼽히는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도 센터 공연을 거부했다. 국립교향악단의 티켓 판매도 급감하고 있다.
민주당에선 케네디센터 명칭 변경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낸 상태다. 조이스 비티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은 “케네디센터는 연방 법에 따라 존 F 케네디를 위한 국가적 추모 공간이지 특정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대통령도 자신의 이름을 붙일 권한이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센터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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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워크 문화’ 척결 정치적 행보
케네디센터는 1964년 연방 의회가 암살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추모의 뜻을 담아 1971년 문을 연 문화 기관이다. 설립 당시부터 이사회가 공화·민주 양당이 함께 참여하는 초당적 협의체로 설계되는 등 당파적 성향과는 거리가 먼 문화시설로 운영돼 왔으며, 매년 2000회 안팎의 공연이 열린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센터 이사진을 수지 와일스 대통령 비서실장, JD 밴스 부통령 부인 우샤 밴스 등 측근 인사들로 채우고 스스로 이사장에 오르는 등 대대적인 물갈이에 나섰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연 예술계를 비롯한 미국 사회 전반의 이른바 ‘워크(Woke) 문화’를 척결하겠다는 정치적 행보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케네디 공연예술센터에서 열린 제48회 케네디센터 명예의 전당 시상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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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쇼 진행자 “미국 폭정 기승”
이 같은 기조를 가진 트럼프 대통령과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의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인 지미 키멜은 25일 영국 TV 채널4에 출연해 “파시즘 관점에서 보면 올해는 정말 좋은 해였다. 미국에서 폭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말했다. 키멜은 자신의 토크쇼에서 청년 보수단체를 이끄는 고(故) 찰리 커크 암살 사건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과 마가 진영이 정치적 이득을 위해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로 인해 방송 중단 위기를 겪다 일주일 만에 재개한 바 있다.
문화 예술계에서는 개별적 대응을 넘어 ‘자유의 몰락(Fall of Freedom)’이란 이름의 조직적 저항운동을 펴고 있다. 퓰리처상 작가 린 노티지, 시각 예술가 드레스 스콧, 영화감독 에이바, 가수 존 레전드 등은 케네디센터 이사진 교체 등 트럼프 행정부의 문화계 개입 시도를 ‘권위주의적 통제’ ‘자유의 몰락’이라고 규정하며 미 전역에서 반(反)트럼프 공연 활동을 펴고 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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