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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하지 않기로 했다”···군부 ‘가짜 선거’에 맞서는 현상수배범들의 저항[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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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하지 않기로 했다”···군부 ‘가짜 선거’에 맞서는 현상수배범들의 저항[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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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4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시위대가 색칠한 부활절 달걀을 쥐고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21년 4월4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시위대가 색칠한 부활절 달걀을 쥐고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얀마 군정이 오는 28일(현지시간)부터 내년 1월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총선을 실시한다. 2021년 무력으로 민정을 전복한 지 4년10개월 만에 처음 열리는 선거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군정이 총선에서 야당을 배제하고, 330개 지역 중 274곳에서만 투표를 진행하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이번 선거가 군부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군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투표 거부 운동을 벌이자 군정은 폭력을 동원해 이들을 탄압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미얀마에서 투표 거부 운동을 조직한 현지 활동가 4명을 지난 21일 인터뷰했다. 당국에 수배된 이들의 안전을 위해 소모뚜 주한 국민통합정부(미얀마 민주진영 임시정부) 사무처장과 쬬산 미얀마연방민주주의승리연합 사무국장이 보안 메신저를 통해 질문과 답변을 전달했다. 활동가들은 이번 총선을 두고 “군정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꼼수”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가짜 선거”라고 비판했다.

쿠데타 이후 5년의 어둠···시민에게 총부리 겨눈 군


군부는 2021년 2월1일 새벽 아웅산 수지 당시 미얀마 국가고문 자택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수지 전 고문은 국가보안법 위반, 부정 선거 등 혐의로 현재 구금 중이다. 군은 쿠데타 이튿날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을 수장으로 하는 국가관리평의회를 구성해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했다.

군정은 독재에 항의한 시민들을 잡아들였고, 군부와 민주진영 간에 내전이 벌어지며 실향민이 속출하고 학교와 병원이 파괴됐다.

2021년 2월26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이던 시민이 경찰에 체포돼 연행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21년 2월26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이던 시민이 경찰에 체포돼 연행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국제사회는 미얀마를 ‘위험 국가’로 지정하고 지원 사업을 끊었다. 2021년 미얀마 연간 경제성장률은 -18%로 곤두박질쳤고 물가는 치솟았다. 슈웨 윈 아웅 미얀마총파업연대(GSCB) 활동가(27)는 5년 전 30만짯(약 20만원)하던 휴대전화 가격이 현재 130만짯(약 90만원)으로 올랐고, 1ℓ당 1000짯(약 700원)하던 기름값은 5000짯(약 3500원)으로 5배 상승했다고 했다.

지난 3월 만달레이 인근에서 규모 7.7의 강진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군은 ‘정부’ 역할을 못 했다. 되레 저항 세력이 점령한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하면서 구호 활동을 제한했다.


아웅은 “지진 진동을 군부 공습으로 착각해 나무 아래 숨었다가 나무가 쓰러지면서 깔려 죽은 아버지와 아이가 있다고 들었다”며 “이것을 물리적 피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정신적 외상에 의한 비극이라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코 판다 GSCB 활동가는 “(군정의) 인권 유린은 일상이 됐고 법 대신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부패한 시스템이 굳어졌다. 국민은 물가 폭등과 경제 위기 속에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며 “미얀마 사회 전체가 자유를 잃고 최악의 어둠 속을 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 정당 해산하고 저항 세력 무더기 체포…기울어진 선거판


지난 9일(현지시간) 미얀마 북부 샨주 나웅키오 주민들이 오는 28일 총선을 앞두고 인민당 후보들의 공약을 듣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미얀마 북부 샨주 나웅키오 주민들이 오는 28일 총선을 앞두고 인민당 후보들의 공약을 듣고 있다. AFP연합뉴스


국가관리평의회는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25일까지 전국 330개 지역 중 274곳에서 세 차례에 걸쳐 선거를 실시한다. 유권자 명부 확보에 차질이 빚어져 투표일이 사흘로 나뉘었다. 무장 저항 세력이 점령한 나머지 56개 지역에선 선거를 치르지 않는다.


미얀마 시민들은 군정이 국제사회에서 통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선거를 이용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군정은 선거 승리를 위해 일찌감치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을 짰다. 2023년 ‘새 정당 등록법’을 만들어 새로 당 등록을 거부한 40여개 민주 진영 정당을 향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57개 친군부 정당만 총선에 후보를 냈다. 장성들은 친군부 성향의 통합민주연합(USDP) 후보로 대거 출마했다.

군정은 국민에게 투표를 강요하고 있다. 판다는 군정 관리들이 무장한 군인들과 함께 바고 지역의 공장 단지를 찾아 “투표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노동자들을 협박했다고 전했다. 이장을 통해 가구원 명단을 강제 수집하거나, 마을회관 앞에 군인을 배치하고 주민을 불러모아 투표하라고 윽박지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선거 거부 운동을 벌인 활동가 다수는 구금돼 있다. 국가관리평의회는 지난해 6월 선거 거부 운동을 벌이는 시민에게 징역 최대 20년을 내릴 수 있는 선거보호법을 공포했다. 툰 툰 나웅 군정 내무장관은 지난 16일까지 이 법을 위반한 229명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미얀마나우 등 현지언론은 투표 독려 선전 영화를 비판하는 SNS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 영화감독, 통합민주연합 선거 현수막이 바람에 넘어지자 웃은 남성 등이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기소·재판 과정은 비공개로 이뤄졌고 면회도 극히 제한했다. 심문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되는 정치범들이 부지기수라고 활동가들은 전했다.

이런 현실에도 미얀마 시민들은 군부에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자신을 ‘찬’이라고 소개한 ‘만달레이 반군부 세력 협조 위원회’ 활동가는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선거”라며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판다도 내란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지만 당국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선거 거부 운동을 하고 있다.

미얀마 저항 활동가가 군부의 선거 강요를 풍자하기 위해 그린 만평(왼쪽)과 미얀마총파업연대(GSCB)가 제작한 탄쟛의 한 장면. 페이스북 갈무리

미얀마 저항 활동가가 군부의 선거 강요를 풍자하기 위해 그린 만평(왼쪽)과 미얀마총파업연대(GSCB)가 제작한 탄쟛의 한 장면. 페이스북 갈무리


군부 독재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2년간 옥살이를 하다 풀려난 아웅은 전국 시골을 돌아다니며 선거 거부 운동을 하고 있다. 미얀마의 불합리한 상황을 풍자하는 그림, 음악, 미얀마 전통 노래극 탄쟛을 창작해 작품을 온라인에 올리기도 한다.

저항 활동가들이 군의 감시를 피하면서도 도로 사정이 열악한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쓰는 교통수단은 오토바이다. 이들이 타는 낡은 오토바이를 미얀마인들은 ‘아료켝’(뼈만 남은 바퀴)이라고 부른다.

미얀마 저항 활동가들이 농촌 지역에 선거 거부 운동을 하기 위해 탔던 오토바이. 페이스북 갈무리

미얀마 저항 활동가들이 농촌 지역에 선거 거부 운동을 하기 위해 탔던 오토바이. 페이스북 갈무리


농촌 주민들은 아료켝을 타고 나타난 활동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아웅이 방문한 어느 지역에선 주민 3만명 이상이 ‘군부의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지장을 찍어줬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열악한 지역이 다수 있는데도 선거 거부 청원 사이트에 179만여명이 서명했다. 미얀마 인구는 54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아웅은 “군부 독재 시스템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만 다음 세대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라며 “이 혁명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도, 인권도, 정의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각오로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타이자르 산 지식전파사회 활동가(37)도 지난 3일 ‘제2도시’ 만달레이 자이초 시장에서 선거 거부 시위를 벌였을 때 시민들과 연대감을 느꼈다고 했다. 상인들은 시위대에게 군경이 없는 골목으로 길을 안내하거나 물잔을 건넸다.

산은 “한국은 과거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이 있는 나라이기에 미얀마 민중들은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우리는 금전적인 원조만을 바라는 게 아니다. 국제사회가 ‘가짜 총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주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최경윤 기자 ck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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