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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홍콩 호령하던 97세 거상의 퇴장… 리카싱 일가, 핵심 자산 대규모 매각 추진

조선비즈 유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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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홍콩 호령하던 97세 거상의 퇴장… 리카싱 일가, 핵심 자산 대규모 매각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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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움직이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리던 리카싱 일가의 ‘CK허친슨’ 그룹이 핵심 자산을 잇따라 매각하거나 상장하며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전 세계 항만과 통신, 소매업을 아우르며 홍콩 경제 실핏줄 역할을 맡았던 이들은 ‘기업 가치를 높이려는 경영 전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일각에선 그 이면에 미·중 갈등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파고와 세대교체라는 절박한 과제가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24일(현지시각) 블룸버그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외신을 종합하면 CK허친슨은 글로벌 항만 자산 43곳을 190억 달러(약 28조 1200억원)에 현금 매각하는 논의를 시작했다. 이번 매각 규모는 그룹 전체 글로벌 포트폴리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준이다. 동시에 그룹 핵심 수익원인 소매 부문 왓슨스(AS Watson)을 홍콩과 영국 런던증시에 이중 상장을 통해 최소 20억 달러(약 2조 9600억원)를 추가로 확보할 계획이다. 외신들은 “홍콩을 움직이던 거대 제국이 운영 중심 사업 구조를 버리고 투자 전문 기업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전환점에 섰다”고 평가했다.

리카싱 청쿵그룹 창업자·CK허치슨홀딩스 선임고문이 지난 2012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을 만나 그룹간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조선DB

리카싱 청쿵그룹 창업자·CK허치슨홀딩스 선임고문이 지난 2012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을 만나 그룹간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조선DB



과거 홍콩에서 리카싱이라는 이름은 곧 홍콩 시민의 일상을 의미했다. 아침에 눈을 떠 전등을 켜면 리카싱 소유 발전소가 전기를 공급했다. 집을 나서면 그가 세운 아파트 단지를 지났다. 점심은 왓슨스에서 산 생필품을 들고 허친슨 항만을 거쳐 들어온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었다. 리카싱이 일군 허친슨 왐포아는 단순한 기업 집단을 넘어 홍콩이라는 도시를 운영하는 거대한 인프라였다.

하지만 1997년 홍콩 반환을 계기로 리카싱은 체질 개선을 시작했다. 그는 홍콩 주권이 중국 아래로 넘어가면 발생할 정치적 변동성을 예견했다. 그래서 허친슨 왐포아 본사를 홍콩에 두되, 사업 무게중심은 유럽과 서방 국가로 빠르게 옮겼다. 리카싱은 이후 영국 통신 시장과 유럽 항만 인프라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2015년에는 허친슨 왐포아를 비부동산 부문인 CK허친슨과 부동산 부문인 CK에셋으로 그룹을 쪼개 지배구조를 다듬었다. 당시만 해도 홍콩 자본은 서방 세계에서 중국과 서구를 잇는 안전하고 중립적인 자산으로 환영받았다.

홍콩에서 열린 CK 허치슨 홀딩스 연례 주주총회에서 공식적으로 퇴임을 밝힌 리카싱. /연합뉴스

홍콩에서 열린 CK 허치슨 홀딩스 연례 주주총회에서 공식적으로 퇴임을 밝힌 리카싱. /연합뉴스



최근 몇 년 사이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홍콩 기업을 바라보는 서방 시각은 중립적 자본에서 중국계 자본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내내 중국을 압박하며 홍콩 기업들에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친중(親中) 프레임을 씌웠다. 북미와 유럽 등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면 중국 기업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데, 홍콩에 기반을 둔 이상 이를 증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특히 국가 안보와 직결된 항만과 통신 분야에서 허친슨이 겪는 압박은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블룸버그는 관계자를 인용해 “허친슨 그룹이 파나마 운하 인근 항만 자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미국 투자사 블랙록이 인수에 관심을 보이자, 중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결국 허친슨은 중국 국유기업 코스코(COSCO)를 매각 협상 대상에 부득이하게 추가했다. 서방 국가들은 안보 이유로 허친슨 같은 홍콩 기업이 항만을 운영하는 상황을 경계하고, 중국 정부는 자국 기업이 이미 확보한 자산을 서방으로 넘기지 않으려는 형국이다.


CK 허치슨 홀딩스의 회사 로고. /연합뉴스

CK 허치슨 홀딩스의 회사 로고. /연합뉴스



이번에 매물로 나온 항만 43곳은 허친슨이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온 글로벌 물류 네트워크 핵심 자산이다. 이를 묶어서 통째로 판다는 것은 더 이상 운영사로서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대신 현금을 확보해 지정학적 리스크가 낮은 분야에 재투자하거나, 자산을 방어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소매 부문 왓슨스(Watsons) 상장 추진도 같은 맥락이다. 왓슨스는 전 세계 31개 시장에서 1만 70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한다. 그룹 매출 41%를 책임지는 효자 사업부다. 하지만 리카싱 일가는 이 핵심 사업 지분을 시장에 내놓고 현금을 챙기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제국의 정리’라고 표현했다.

리 가문은 운영 리스크가 큰 CK허친슨 지분 비중을 점진적으로 조절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부동산 자산을 보유한 CK에셋 지분은 꾸준히 늘려 49%까지 끌어올렸다. 직접 사업을 운영하며 규제와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기보다, 부동산과 같은 실물 자산을 보유하며 임대 수익과 자본 이득을 취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홍콩 기반 자산 운용사 VL 에셋 매니지먼트 빈센트 람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리 가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 확장보다 수십 년간 일군 막대한 부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라며 “지정학적 파고 속에서 자산을 현금화해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분석했다.

유진우 기자(oj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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