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 기자 |
" 혼자서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같은 마음으로 걷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12·29 제주항공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이지현씨의 어머니 정미라씨는 참사 유족에게 전하는 편지에서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썼다. 그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 개인의 불행으로만 정리돼선 안 된다는 사실을 같은 고통 속에서 배웠다”며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함께하겠다”고 했다.
과거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재난의 크기와 시기, 벌어진 장소 등에 따라 사회적 관심과 국가의 대응이 달라지는 현실을 지적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희생자 고(故) 안선정씨의 외삼촌 이경구씨는 “사망자 수에 따라 사회적 관심과 정부 대응이 달라지는 현실을 보며 ‘죽음 값’이 존재한다고 느낀다”며 손편지를 전했다.
삼풍백화점붕괴사고 생존자 이선민씨. 전민규 기자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생존자 이선민(49)씨도 “제주항공 참사는 179명이 숨진 대형 참사였지만 계엄과 대통령 파면 국면을 거치며 완전히 묻혔다”며 “인천에서, 대한항공 항공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관심이 빨리 식었을까 싶다”고 안타까워했다.
지지부진한 진상규명도 과거 참사 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씨는 “정부 책임은 불분명한 가운데 가족들이 발 벗고 대응하는 점이 30년 전 삼풍과 다를 것이 없다”고 짚었다.
대구지하철·세월호·이태원·아리셀 등 참사 유족들은 지난 22일 광주에서 ‘책임져야 할 국가의 부재와 부인’을 주제로 원탁회의를 열고 제주항공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했다.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 협의회는 여러 사회적 참사 유가족들의 바람을 모아 28일 선언문을 발표하고, 29일 추모식 당일 정부에 이를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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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가족이 스스로 공부하는 박사가 돼야 하나”
1년 전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어머니(故 강성인씨)와 아버지(故 한찬섭씨)를 잃은 한상연(47)씨가 23일 오후 서울 성수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
진상규명에 대한 아쉬움은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에게서도 나온다. 제주항공 참사로 부모를 잃은 한상연(47)씨는 지난 23일 인터뷰에서 “유족이 요구한 정보는 공개하지 않으면서 질문에는 ‘잘못 알고 계신다’고만 일관한다”며 “왜 유가족을 (사고 원인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게 해서 ‘박사’가 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씨 부모님은 부부동반 태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했다. 참사 꼭 한 달 전 동해에서 연 칠순 잔치가 마지막 기억이다. 그는 “얼굴 부분 시신 훼손이 심했지만, 어머니 입가 주름을 보고 단번에 알아봤다”며 “1년 전 공항에서 희생자 명단을 확인하고서도 구호 텐트에 앉아 어머니 휴대전화 번호로 계속 전화를 걸었다”고 울음을 삼켰다.
한씨는 결국 피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한씨는 “결국 비슷한 참사를 겪은 사람들과의 대화만이 버티는 힘이 된다”면서 “누구에게라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니, 유족들이 1인 시위를 하면 괜히 한 번 구경이라도 해주시고, 주변에 알려주시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씨의 둘째 동생은 군인으로 근무할 당시 천안함 사고 현장 수습을 돕기도 했는데, 20년 후 참사의 유가족이 됐다고 한다.
제주항공 참사로 부모님을 잃은 한상연씨가 부모님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강정현 기자 |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은 “누구도 신뢰할 만한 답변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왜’라는 의문에 답하려 유가족이 거리에 나오거나 전문가가 되는 게 현실”이라며 “비슷한 처지의 재난 피해자들과 경험을 나누고, 또 다른 참사의 악순환을 끊을 지혜를 구하는 과정이 큰 위로이자 용기”라고 말했다.
재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 유포나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삼가주세요. 재난을 겪은 뒤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는 경우 ☎02-2204-0001(국가트라우마센터) 또는 1577-0199(정신건강위기 상담전화)로 연락하시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재난보도준칙을 준수하였습니다.
이아미 기자 lee.ah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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