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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996년 총파업의 함성과 시린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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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996년 총파업의 함성과 시린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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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총파업

1996년 12월 26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원 1만5,000여 명이 울산 태화강 둔치에서 개최한 노동법 날치기 통과 규탄대회.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12월 26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원 1만5,000여 명이 울산 태화강 둔치에서 개최한 노동법 날치기 통과 규탄대회.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기치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몰두했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시킨 대통령으로 기억되고자 했던 정치적 야심과 OECD라는 외부 동력을 활용해 각종 경제 규제와 후진적 금융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경제적 야심이 그 배경에 있었다.

정부는 그해 12월 3일,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골자로 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발표했고, 9일 뒤인 12일 YS는 OECD 29번째 회원국 대통령이 됐다. 그리곤 야당과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12월 26일 새벽 여당(당시 신한국당) 단독 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를 감행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당시 전노협)은 곧장 연대 총파업을 선언했다. 연인원 100만 명이 이상이 참여한 사상 최대 규모 파업이자, 97년 2월 말까지 이어진 사상 최장 총파업이 그렇게 시작됐다.

개정 법안의 요지는 변형 근로시간제 확대(노동시간 연장), 정리해고 요건 완화, 복수노조 허용 연기(산별노조 결성 제한), 제3자 개입 금지조항 유지(노조 상급단체 개입 금지)였다. 27일 민주노총 사업장부터 시작된 총파업은 얼마 뒤 한국노총까지 가세하면서 자동차, 금속, 조선을 넘어 학교와 병원 등으로 가히 들불처럼 확산됐다.

총파업은 정부의 노동법 재개정 약속과 함께 끝났다. 97년 3월 재개정 법안의 골자는 정리해고제 2년 유예, 복수노조 허용(2002년부터) 등이었다.

총파업은 국회와 정부의 입법 과정을 뒤집은 ‘정치 투쟁의 승리’였지만, 정리해고제 등의 시행 시점만 유예했을 뿐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했다. 8개월 뒤인 97년 11월 21일, YS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 요청 계획을 공식 발표했고, 98년 김대중 정부는 노동관계법을 다시 개정,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 등을 즉각 시행함으로써 96년 총파업의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렇게 '신자유주의'가 한국을 장악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