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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다시 “대화 운동”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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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다시 “대화 운동”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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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탄과 세밑조차 이 나라는 차분하기보다는 외려 숨 가쁘다. 고즈넉하게 자기 삶의 한 해를 돌아보는 개인을 넘어, 전체 공동체 차원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갈등과 드잡이뿐이라서 시간의 한 매듭이라는 의미를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공동체는 언제까지 이렇게 온 구성원을, 아니 온 구성원끼리 온통 난리 법석을 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방법은 없을까?

오래전 한 인류선현은 삶을 두 종류로 나누어 ‘천국의 악마’와 ‘지옥의 천사’를 유비하여 우리를 크게 당혹케 하였지만, 실제 삶에서는 둘 다 전연 불가능한 조합이다. 세상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 대화단절·파괴 심각

민주주의 본령 완전 일탈

입법부·행정부도 검찰화·법원화


대화문화·대화운동 복원 절실

실제로 인간본성에 대한 인류의 오랜 논의는 이를 뚜렷하게 반영한다. 고전고대 시기의 ‘정치적 동물’과 ‘사회적 동물’ 관념으로부터 시작하여, 근대 초기 이에 정면 반기를 든 ‘자연상태’ 및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관념을 거쳐, 인류는 마침내 ‘반사회적 사회성’, ‘이기심과 동정심의 공유’, ‘이중적 인간(homo duplex)’,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공존’이라는, 여러 학문 분과에 걸친 대략적인 합의에 도달한 바 있다. 물론 이는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이 아닌, 종교와 신학에서는 일찍부터 깊게 언명된 명제이다.

그런데 세상이 천국도 지옥도 아니며, 인간이 천사도 악마도 아니라는 인식에 일정한 합의를 이룬 이후 중심적인 노력은, 천사와 악마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완화를 위한 방법과 제도의 발굴과 창안이었다. 특히 인민·시민·자유민·공민 내부의 공존·공공성·공통성의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거기에서 신·진리와의 맹약은 비로소 인간 사이의 계약·약속으로 전화되어 둘 모두 존재 가능한 공통 근거를 갖추게 된다. 마침내 신과 인간, 진리와 자유, 종교와 정치, 신념과 관용이 병진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대의 가장 큰 발견이자 가장 큰 역설의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갈래와 이름으로 표출되었는 바, 주권·시민·시민사회·대표·의회·공영사회·공화국·공통감각 등은 그중 일부였다.

이들을 관통하는 중심 관념은 자유와 안전을 위한 대화와 소통, 타협과 의회였다. 이들은 갈등완화와 공존을 위한 최중요 요소였다. 즉 현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대화·소통·의회라는 말에서 출발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의회민주주의요 대화민주주의로 불린 이유다. 현대민주주의는 대화·소통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대화가 가장 불가능한 영역은 바로 의회와 정치다. 적대와 증오로 양극화가 가장 심한 곳 역시, 시장도 시민사회도, 종교도 젠더도, 학교도 언론도 아닌 정치와 의회다. 대화가 본령인 의회는 대화를 차단한 채 상대를 유죄집단·범죄집단으로 간주하여 배제와 적대, 일방통행을 반복한다. 나아가 서로 끝없는 응징·고발·처벌·타도를 언명한다. 국민주권을 통한 선택과 선거의 의미는 실종된다. 스스로 유사 법원과 유사 검찰로 전변되었다. 대화의 실종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품격은 고사하고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고 나라를 불안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국민을 향해서는 안정과 통합을 말하고, 학교와 교육을 향해서는 대화·타협·민주주의를 가르치라고 하고 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대화와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있는가?

관료와 행정부는 정책의 집행을, 사법부는 법률의 적용과 판결을 담당한다면, 선출직과 입법부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입법과 공준(公準)을 담당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정치 관념과 행태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갖는 검찰과 법원 하나밖에 없다. 의회도 선출직도 판사·검사와 하등 다르지 않다. 가장 큰 불행이다. 위헌적 비상계엄을 위헌적 방법으로 징치해선 안된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합법적·민주적으로 수호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이번 달 초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종교·사회·정치·언론·교육·문화·생태·평화 부문의 여러 인사들이 모였다, 한국사회에 대화·대화운동·대화문화·대화모임을 제창하여 큰 각성과 변화를 일으킨 크리스챤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 창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강원용 목사가 주도한 대화운동은 종교·정치·교육·젠더·노동·문화·생태·평화, 그리고 한반도·동아시아·세계로 크게 확장된 바 있다. 여러 부문의 지도자들 역시 폭넓게 참여하여, 수많은 개인적·집단적 ‘대화의 사건’을 일으키며 대화문화 함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사회의 갱생과 성숙을 위해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대화의 복원이다. 하여, 대화문화아카데미 60주년을 맞아 다시 대화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창한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살려낼 이 상서로운 바람이, 최악인 정치와 의회에서부터 불기를 호소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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