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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라드 칼럼] 김정은이 터뜨린 샴페인, 내년에도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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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라드 칼럼] 김정은이 터뜨린 샴페인, 내년에도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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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2025년을 보내는 북한 지도부는 축배를 들고 있을지 모른다. 가장 큰 성과는 러시아와 밀착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가 사용한 포탄 60%와 대규모 병력을 제공하며, 사실상 전쟁 수행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했다. 그 대가로 석유와 곡물, 자금, 기술을 얻었고, 유사시 러시아가 북한을 도울 것이라는 정치적 보증까지 손에 넣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전사자들을 영웅으로 예우하며 유가족의 불만을 잠재운 것도 체제 관리의 일환이다.



러와 밀착, 미국의 무관심으로

북한 지도부, 연말 축배 분위기

북에 유리한 정세 지속 예단 못해


외교 환경도 북한에 우호적으로 흘렀다. 중국은 지난달 27일 발표한 군축 백서에서 기존에 담겨있던 ‘북한 비핵화’를 삭제했고,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에는 북한이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 사이 북한은 신형 함정과 전차, 드론을 앞세워 군 현대화를 가속했고, 2021년 시작한 국방발전 5개년 계획도 상당 부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올해 북한이 해킹을 통한 가상화폐 탈취 규모를 20억 달러(약2조9000억원)로 역대 최대 규모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은 이제 전 세계 암호화폐 절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가 됐다. 북한의 ‘사이버 전사’들은 교묘하고, 집요하게 북한 전문가들을 해킹하기도 한다. 필자가 학술회의 주최측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해킹해 가짜 메일을 보내고 심지어 위조 항공권까지 첨부하며 악성 링크를 클릭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새해를 맞아 샴페인을 들이키는 북한 지도부는 올해의 ‘성과’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의적 무관심(benign neglect)’ 등 두 가지의 지정학적 우연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문제는 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발 대북 지원이 급감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이 된다. 그만큼 중국 의존은 더 커질 것이고, 중국은 이를 지렛대로 북한의 도발을 제약하려 할 것이다. 미국의 정책 역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무겁다. 코로나19로 인한 국경봉쇄 속에 추진된 경제 회복을 위한 5개년 계획은 목표 달성이 불투명하다. 지난해부터 북한이 강조하고 있는 ’20×10’(매년 20곳의 지방에 공장을 건설하는 정책을 10년간 추진)정책도 공장 건설 속도와 자원 부족을 감안하면 기대만큼 성과를 낼지 의문이다. 성과가 미흡할 경우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최고지도자에게 돌아간다.


간부들의 충성심 문제도 여전하다. 북한 최고 지도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간부들의 사상적 헌신을 강화하라고 주문한다. 이는 체제가 소비주의의 성장을 허용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개인 차량을 사고, 아파트에 각종 가전제품을 들여놓고, 원산·갈마 같은 휴양지에서 호화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의 충성도는 체제가 자신들의 부를 보장하거나, 더 큰 부를 축적하는 길을 터주느냐에 달려 있다. 국경이 다시 열리며 합법·불법 무역이 늘어나자 부의 분배를 독점하던 체제의 힘, 그리고 이 계층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유층과 대다수 빈곤층 사이의 격차다. 출신성분과 혈연이 지배하는 경직된 북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노력만으로 신분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빈부 격차는 체제에 대한 분노로 쌓일 가능성이 크다. 세계 최고라고 쓰고, 최악이라 불리는 북한 해커들은 사용자들이 비밀번호를 실수로 노출토록 하는 식으로 가상화폐를 탈취해 왔다. 그러나 북한의 해킹 수법이 알려지며 성공률도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북한 지도부는 2025년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하고, 다음 달 열릴 9차 당대회를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개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 뒤에는 불안이 깔려 있을 것이다. 2026년이 올해 만큼의 성과를 안겨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체제가 직면한 문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현실로 드러난다면 북한 지도부에는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북한 지도부가 올해 성과를 자축하며 지금 마시고 있는 샴페인은 달콤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내년 이맘때도 같은 맛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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