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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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때 공 세워 미·프 훈장
6·25 발발 고국 돕고자 재입대
전쟁 고아 보육원 대대적 후원
이중서훈 금지에 모란장 만족
미국서 독립운동 김순권 선생 아들
김영옥 대령. [중앙포토] |
이날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군목 샘 닐 대위가 대대장을 찾았다. 대대장은 미군 최초의 유색인(백인이 아닌 인종) 야전 대대장 김영옥 소령이었다. 김영옥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순권 선생의 아들이었다. 닐 대위 곁엔 꾀죄죄한 모습의 소년이 서 있었다. 부대원이 눈길에서 소년을 발견했다고 한다. 소년은 열한 살로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다. 나중에 지미(Jimmy)로 불렸다.
닐 대위는 지미에 대한 처분을 김영옥에게 구했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에 지미를 둘 수도 없고, 무턱대고 부대 밖으로 쫓아낼 수도 없었다. 김영옥은 고민 끝에 지미를 보육원(고아원)에 맡기고, 그 보육원을 돕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명령을 내리지 않고 1대대의 의사를 물었다. 1대대는 모두 찬성했다.
김영옥은 1951년 3월 난생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부산역에서 겪은 광경을 잊지 못했던 터였다. 1000여 명의 헐벗은 아이들이 미군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거나 기차 밑에 떨어진 석탄 조각을 줍고 있었다. 김 대위가 미군에게 소리쳤다. “저 밖에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다. 여기 쌓여 있는 C-레이션(전투식량)은 여러분 것이다. 한두 끼쯤 배불리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깡통 한두 개씩만 빼고 나머지를 내게 달라. 아이들에게 주겠다.”
곧 C-레이션 깡통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김영옥은 다른 장교의 도움을 받아 부산역 아이들에게 깡통을 나눠줬다. 객실에 탄 김영옥에게 깡통 한 개를 움켜쥔 아이들의 함박웃음이 창 너머로 들렸다. 그가 많이 울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의 부대가 돌봤던 경천애인사 아이들. 경천애인사 터는 지금 서울 삼각지에 있다. [사진 한우성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
김영옥은 지미를 맡길 보육원을 알아봤고, 그게 경천애인사였다. 감리교의 장시화 목사가 세운 보육원이었다. 당시 경천애인사에는 192명의 고아가 있었다. 세끼도, 겨울옷도 변변치 않았다.
1대대가 팔을 걷어붙였다. 부대원이 미국의 가족에게 편지를 썼고, 얼마 후 옷가지와 장난감이 경천애인사로 쏟아졌다. 1대대는 군수품으로 나온 맥주와 담배의 절반을 암시장에 팔아 번 돈을 경천애인사의 재정에 보탰다. 덕분에 경천애인사는 서울에서 가장 풍족한 보육원으로 컸다. 500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이곳에서 전화를 극복했다.
김영옥은 경천애인사를 딱 한 번 찾았다. ‘키다리 아저씨’로 만족했던 모양이다. 그는 2003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을 때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경천애인사 출신들이 그와 해후했다.
김영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미국 수훈십자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이탈리아 십자 무공훈장은 그의 무훈을 말해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국을 지키겠다며 재입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으로서 내 아버지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직접 도울 수 있는 길, 그리고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이 한국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직접 갚을 수 있는 길은, 한국으로 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다.” 여러 번 다쳤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에도 한국에 남아 군사고문
김영옥은 한국에 세 가지 업적을 남겼다. 그는 6·25전쟁 때 중부전선을 60㎞나 북쪽으로 끌어올려 오늘의 휴전선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장군 진급을 포기하고 군사고문으로 남아 한국군을 도왔다. 그리고 전쟁고아 500여 명을 돌봤다. 그는 생전 “100% 한국인이면서 100%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에 대한 김영옥의 사랑은 한평생 이어졌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의회에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올라왔다. 일본계 사회가 들끓었다. 김영옥이 나섰다. 그는 일본계 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2차대전 참전자들을 설득했다. 참전자들은 그의 옛 부하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전쟁에서 힘을 합쳐 싸운 이유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다. 위안부는 한·일의 문제가 아니라 반인륜적 전쟁 범죄다.”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됐다. 일본계 사회가 김영옥의 말에 귀 기울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계의 강제수용소 수용에 대해 사과·배상하도록 앞장섰다. 인권과 민권은 그의 신념이었다.
‘아름다운 영웅(Beautiful Hero)’ 김영옥은 2005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닷새 후 그의 서거 20주기다.
미국은 김영옥을 높이 기린다. 김영옥 중학교,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주립대 김영옥 재미한인 연구소, 김영옥 고속도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국 의회에선 김영옥에게 의회 명예황금훈장을 수여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이 훈장은 명예훈장·대통령 자유훈장과 동급인 미국 최고 훈장이다.
프랑스에서는 최고 무공훈장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정부는 김영옥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주면서 “당신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프랑스는 이 훈장이 미·불 관계뿐 아니라 한·불 관계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영옥에 대한 예우는 한국에서 어떤가. 문재인 정부 시절 LA 총영사관이 김영옥의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를 건의했다. 무궁화장은 그가 받은 모란장보다 높은 최고 등급이다. 외교부도 공감했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됐다. ‘동일공적 이중서훈(같은 공적에 훈장을 두 번 주는 것) 금지’ 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한국의 위상 강화와 한인에 대한 그의 기여는 무궁화장에 충분한 공적이며, 이는 모란장 공적과는 다르다.
김영옥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많은 것을 남겼다.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에 이은 최고 훈장인 무궁화장도 정말 약소한 보답일 것이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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