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의 두 주인공 영실(왼쪽)과 세종. 작품에선 장영실의 ‘꿈’을 상징하는 ‘별’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소재로 쓰인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윗옷은 속적삼 받쳐/ 저고릴 걸쳐 입고서/ 배자를 둘러 입고/ 그 위로 두루마길 두 겹 더해/ 두 겹 중에 겉의 답호가/ 밑의 철릭보다도/ 더 짧은 복식은 조선 초기뿐/ 오래된 한을 풀어낼 이야기.”
그림 속 남자는 망건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있다. 품이 넉넉한 옷자락, 물결치듯 내려오는 선까지 한복을 떠올리게 하는 이 드로잉의 화가는 플랑드르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 어떻게 17세기 그림에 조선의 복식이 등장했을까. 창작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이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소설적 상상력을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대가 교차하는 대담한 이야기로 무대에 펼쳐낸다.
올겨울은 여느 해보다 많은 대작 뮤지컬이 막을 올렸다. 그 중 ‘튀는’ 작품이 <한복 입은 남자>이다. 그간 서양 배경의 라이선스·창작 뮤지컬만 올려온 EMK뮤지컬컴퍼니에서 조선시대 배경 작품을 선보인다는 소식에 공연계의 관심이 모였다. 선 굵은 이야기에 화려한 무대와 의상, 호소력 있는 음악을 갖춘 볼만한 대극장 뮤지컬이 탄생했다.
동명의 장편소설이 원작인 작품의 발단은 ‘장영실의 미스터리’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노비에서 종3품 벼슬까지 오른 ‘천재 과학자’ 장영실은 1442년 임금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 이후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았다. 이 역사적 공백으로부터 장영실이 명나라 탐험가 정화의 배를 타고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로 건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긴다는 상상을 펼쳐낸다.
<한복 입은 남자>의 공연 모습. 1막에선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2막에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한복 입은 남자>의 공연 모습. 1막에선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2막에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1막은 조선, 2막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는 루벤스의 드로잉 <한복 입은 남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방송국 PD 진석이 이탈리아인 엘레나로부터 비망록 한 권을 건네받으며 시작된다. 진석은 역사학자인 강배와 비망록에 담긴 숨겨진 진실을 추적하고, 그로부터 600년 전 영실이 조선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된다.
방대한 이야기를 뮤지컬에선 직관적으로 구성했다. 수구 세력과 개혁 세력의 갈등을 축으로, 장영실의 일대기를 엮어낸다. 배우들은 모두 1인 2역을 맡아 과거와 현재 인물들의 관계성을 알기 쉽게 했다. 과거의 영실을 연기하는 배우는 현대에선 비망록 속 영실의 언어를 해석하는 강배로, 과거 영실을 떠나보낸 세종 역의 배우가 현대에서는 영실의 흔적을 좇는 진석으로 등장하는 식이다. 큰 흐름을 중심으로 전개되다 보니 서사의 치밀함을 중시하는 관객에겐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 다만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가창, 무대를 꽉 채우는 앙상블이 더해져 3시간(인터미션 포함)에 달하는 공연이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낯선 땅에 남겨진 영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넘버 ‘그리웁다’가 사랑받을 것 같다. “닿을 수 없는 꿈 그리움을 닮아/ 어제는 희망을 담았던 저 별에/ 오늘은 위로만을 빌고 또 빌어 봐/ 다녀왔어 다녀왔어 한마디만 하게 해주길/ 언젠가 살아 있음의 이유를 알게 되는가/ 가만히 기다리면 편안해질 수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채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복 입은 남자>의 공연 모습.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한복 입은 남자>의 공연 모습.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작품의 또다른 매력은 무대 미술이다. 조선에는 전통 건축의 요소에 수묵화의 ‘번짐’을 더했고, 장영실이 낯설게 느꼈을 유럽은 거대한 조각상과 건축물에 ‘유화’의 느낌을 담았다. 근정전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조선 무대의 공포와 처마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의상의 경우 강한 조명에서도 한복 특유의 느낌을 내기 위해 원단을 여러 겹 겹쳐 색을 냈다.
EMK는 당초 다빈치를 소재로 한 작품을 준비했지만, 원작을 접하며 ‘세계화’에 대한 고민을 확장해 방향을 틀었다.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는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진출 노력을 20년 넘게 하면서 세계적인 소재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최근 K팝 외에도 한국 뮤지컬이 좋은 평가를 받는 등 흐름이 바뀐 것 같다”며 “해외에서 장영실이라는 이름은 낯설 수 있어도, 작품이 담고 있는 역사적 상상과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고 했다.
작품 마지막에선 장영실의 ‘꿈’을 상징하는 ‘별’을 매개로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된다. 엄 대표는 “지구는 둥글고,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어디에나 있다”며 “한국의 세종대왕과 장영실에 대한 상상이 해외 관객에게도 가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무아트센터에서 내년 3월8일까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1617). 위키피디아 |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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