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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 여자한테 속고 계세요”…수억씩 퍼주고도 행복하다는데

매일경제 차창희 기자(charming91@mk.co.kr), 한재범 기자(jbha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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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 여자한테 속고 계세요”…수억씩 퍼주고도 행복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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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환자 노리는 그림자


치매 노인

치매 노인


“간병인이 마치 새어머니라도 된 양 행세하며 아버지의 노후 자금 수억 원을 야금야금 빼돌렸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80대 A씨는 간병인 B씨에게 심리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상태다. B씨는 친밀감을 무기로 A씨의 자산에 손을 댔다. 가족이 파악한 현금 유출액만 3억~4억원에 달한다. 병원비와 생활비로 쓰여야 할 목돈이 야금야금 이전됐고 매달 들어오는 월세 수익도 사실상 B씨에게 상납됐다. 결국 A씨는 세금과 관리비를 체납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들이 성년 후견 심판을 청구했으나, A씨는 “내가 원해서 주는 건데 무슨 상관이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가족과 지인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검은 손’이 치매 노인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 치매 증상 악화로 인해 자산이 동결되기 직전의 사각지대를 노려 예금과 연금 등 금융자산을 가로채는 ‘경제적 학대’가 발생하는 것이다. 치매 노인은 금융지식 또한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에도 휘말린다.

22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치매 노인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학대는 최근 4년 동안 186% 급증했다. 경제적 학대는 치매 노인의 소득과 재산을 가로채거나 임의로 사용하는 걸 의미한다. 전체 학대 유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지만, 건수는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2021년 30건에 불과했지만, 2024년엔 86건으로 급증했고 비중도 3.4%에서 5%로 뛰었다.

특히 A씨처럼 판단력이 흐려졌거나, 의사 표현이 어려워 실제로 경제적 학대를 겪었지만 신고하지 못한 노인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자녀가 치매 부모의 신용카드를 들고 나가 돈을 써도, 경찰에 신고조차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치매노인 경제적 학대 현황

치매노인 경제적 학대 현황


경제적 학대를 가한 행위자는 아들·딸 등 친족이 64.1%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70대에 접어들며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를 노려 가장 가까운 가족에 의한 경제적 학대가 기승을 부린다는 분석이다. A씨처럼 치매 노인을 돌보던 간병인에 의한 횡령 범죄도 비일비재하다.


치매안심금융센터를 운영 중인 하나금융그룹의 주윤신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인에 의한 금융착취,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 피해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간병인, 가사도우미, 이웃 등 주변 사람들이 재산을 가로채거나, 혼인과 입적을 통해 상속받는 피해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특히 후견인 지정 전 치매 의심군인 경도인지장애(MCI) 단계이거나, 발병 초기 판단력이 완전히 흐려지지 않았을 때 은행이 자산을 동결하기 전 사각지대를 노려 경제적 학대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치매 판정을 받아도 민감 정보인 의료 정보는 즉각 금융사에 공유되지 않고, 은행 등이 고객의 의사능력 상실을 알아차렸을 때 자산 동결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올해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298만명에 달한다.

은행 직원이 창구에서 고객의 이상 징후를 직접 발견하거나, 가족이 진단서를 들고 와 신고하기 전까지 계좌가 ‘정상 상태’로 유지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에서 치매를 앓는 C씨의 경우도 자녀 D씨가 최소한의 의사능력을 있을 때 이를 악용해 현금을 빼냈다.


D씨는 C씨를 데리고 은행을 돌며 예금을 모두 인출했다고 한다. 당시 은행 전산망에는 C씨가 정상 고객으로 분류돼 있었다. D씨는 C씨가 아직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서명이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창구 직원의 의심을 피했다.

이어 C씨 명의의 주택도 임의로 처분해 현금을 자신의 계좌로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D씨는 세금이나 요양비를 내지 않은 채 C씨를 요양원에 맡기고 잠적했다. 이후 요양비·의료비는 사실상 국가와 사회보험 재원으로 전가됐다.

최근 60대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급증하는 보이스피싱 범죄도 치매 노인의 지갑을 노리는 대표적인 검은 손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 중 60대 이상 비중은 2020년 16%에서 지난해 25%로 늘었다. 올해도 8월까지 기준으로만 30.6%로 최대치다.


보이스피싱 피해 60대 비중

보이스피싱 피해 60대 비중


특히 20·30대는 소액 손해가 많은 반면, 치매 노인은 은퇴 자금 등 목돈을 가지고 있어 피해 금액이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이스피싱 피해구제 신청(2023년) 사례를 보면 60대 이상의 피해액은 704억원으로 전체의 36.4%를 차지했다.

결국 치매 노인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학대, 금융사기 예방을 위해선 공신력 있는 대리인이 치매 머니 관리를 체계적으로 해주는 제도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금융사들은 치매 환자라고 해도, 법원에서 정식 대리인으로 인정받지 않은 주변인에 의한 거래를 차단하고 있다.

치매 노인의 판단력이 흐려진다면, 그들의 자산이 그대로 금융사에 묶이는 ‘돈맥경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초고령사회에서 치매 고령자의 자산 보호 취약성을 방지하기 위해선 후견과 신탁제도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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