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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트럼프', 회복력 보여주는 미국 민주주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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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트럼프', 회복력 보여주는 미국 민주주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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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美해군 신예 프리깃함, 韓기업과 협력해 만들게 될 것"
글로벌 퇴행과 트럼프의 미국
작동하는 제도적 견제 장치들
2026년 회복력 시험 본격화


지난 11월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재향군인의 날 시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하는 재향군인들이 집회를 벌이는 가운데 죽은 자의 날 의상을 입고 자신을 민주주의 복장이라고 밝힌 미국 참전용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1월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재향군인의 날 시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하는 재향군인들이 집회를 벌이는 가운데 죽은 자의 날 의상을 입고 자신을 민주주의 복장이라고 밝힌 미국 참전용사.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민주주의가 구조적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프리덤하우스와 '민주주의 다양성(V-Dem)' 연구소 등 주요 민주주의 지표 기관들은 올해 초부터 미국 민주주의 등급 하락을 잇달아 경고해 왔으며,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제도적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체제적 변화'의 징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를 점진적으로, 그러나 치밀하게 무력화해 왔다. 법무부와 FBI 등 사법·수사 기관의 수장을 충성파 인사로 임명해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이들 기관을 반대 세력에 대한 조사와 압박 수단으로 활용했다. 언론·대학·시민단체를 상대로는 소송과 자금 동결, 규제 강화를 동원해 비판의 목소리를 위축시켰으며, 군과 국방부마저 권력 강화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또한 의회와 사법부를 우회하거나 무시하며 3권분립의 원칙을 흔들어 권력 집중을 강화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에 정치 보복의 공포가 퍼지고 광범위한 자기검열이 확산되면서 민주적 저항의 기반은 급격히 약화됐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역시 권위주의적 성격을 띠었으나, 국가기관 장악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아 의회·법원·언론의 견제 기능이 일정 부분 작동했다. 그러나 2기에 들어 충성 인사 배치 전략이 정교해지고 주요 기관들의 ‘무기화’가 현실화되면서, 비판 세력을 조직적으로 압박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가 가능해졌다. 동시에 유럽과 중남미의 극우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통치 모델의 국제적 정당화를 꾀하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는 더 이상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민주주의 후퇴(democratic backsliding)’ 흐름과 맞물려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 붕괴의 새로운 경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스럽다. 스티븐 레비츠키는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총칼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규범과 제도 파괴로 인해 무너진다고 분석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는 그의 경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국가기관의 정치화, 사법부와 의회 권한의 약화, 그리고 반대 세력에 대한 조직적 압박은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흔들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미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변화는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시사한다. 우선 트럼프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는 조짐이 뚜렷하다. ‘피크 트럼프(Peak Trump)’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그는 집권 초기에 보였던 권력 장악력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역과 계층별 지지 기반에서도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제도적 견제 장치도 다시 힘을 회복하는 모습이다. 최근 연방 법원은 트럼프의 관세·에너지·이민 정책에 제동을 걸며 사법부의 독립성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 내부에서도 행정부의 일방적 권력 행사에 대한 반발과 거리두기 움직임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2025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선전은 미국 민주주의가 아직 경쟁적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시민사회에서도 ‘노킹스(No Kings)’와 같은 반(反)권위주의 운동이 활력을 얻고 있다.


레비츠키가 지적했듯, 미국은 여전히 독립된 입법부와 사법부, 강력한 연방주의, 활발한 시민사회, 그리고 경쟁력 있는 야당이라는 민주주의 방어 장치를 갖추고 있다.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제도화한 나라지만,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건국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성향의 지도자가 등장할 때마다 제도적 자정 능력이 작동하며 체제는 균형을 회복해 왔다. 19세기 앤드루 잭슨의 포퓰리즘적 통치나 리처드 닉슨의 권력 사유화 시도 역시 결국 견제와 균형의 기제가 작동하며 그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미국 민주주의가 단기적 후퇴를 겪더라도 장기적으로 복원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처럼 선거 없는 권위주의 체제와 달리, 미국은 2년마다 반복되는 자유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이 선거 주기는 권력의 전횡을 막는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다. 미국 정치 체제는 독재자가 강압적 통제 장치를 갖추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진정한 위협은 트럼프의 독재 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 효능감 상실과 사회 전반에 스며든 무력감이다. 건국 250년을 맞는 2026년, 미국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그 회복력을 시험받고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