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현지시간), 침수된 텐트에서 저체온증으로 숨진 생후 8개월 라하프 아부 자자르의 장례식에서 어머니 하자르가 딸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팔레스타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곳 아이들은 우리와 다른 셈법으로 삶의 시간에 구획을 짓는다
1936년생 팔레스타인의 대표적 저항작가인 가산 카나파니에겐 1948년 ‘나크바’(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인 75만명이 강제 추방된 사건)를 경험했던 열두 살이 삶의 구획점이 됐다. 그의 작품들은 나크바의 트라우마와 난민의 험난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열림원)에 수록된 ‘슬픈 오렌지의 땅’엔 고향 집에서 쫓겨나 피란길에 오른 아이가 자신의 유년기가 끝났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대변인으로 저항운동에 나섰던 카나파니는 1972년 이스라엘이 설치한 차량 폭탄으로 암살됐다.
1992년생 가자지구 출신 시인 모사브 아부 토하의 셈법은 다르다. 전쟁과 폭탄이 자신의 나이를 어림하는 기준이 된다. <팔레스타인 시선집>(접촉면)에 수록된 ‘전쟁보다는 어리고’에서 그의 유년 시절은 전투기, 탱크, 기관총으로 가득 차 있다. “라디오는 필요 없다. 우리가 뉴스니까”라는 그는 로켓 공습에 콘크리트와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전쟁보다는 수십 살이나 어리고/ 폭탄보다는 몇 살 더 먹은 나이.” 아부 토하는 현재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주요한 목소리 중 하나로, 전미도서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25년 가자지구에 유년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가자지구 당국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7만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1만8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사망했다. 지난 9월 유엔 산하 독립적 조사위원회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제노사이드)를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한 보고서에서 한 의사는 “가자지구에서 아동기의 본질이 파괴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10일 휴전이 발효된지 2달이 넘었지만 아이들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포탄과 굶주림에 이어 겨울 추위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폭탄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숨지고 있다. 지난주 생후 14일 된 모하메드와 생후 29일 된 사이드가 추위로 얼어붙어 숨졌다. 부모들은 옷가지로 이들을 싸맸지만 얇은 텐트를 파고드는 추위로부터 보호할 순 없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이달 들어 4명의 어린이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이는 명백히 인재다. 이스라엘 공격으로 가자지구 건물이 대부분 파괴돼 주민들은 난민촌 텐트에 머물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텐트와 이동식 주택 등 구호물자 반입을 제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동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선언했지만, 가자지구의 현실은 평화와 거리가 멀다. 휴전 이후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4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영토의 절반 이상은 이스라엘군의 점령하에 있으며, 이스라엘은 휴전선(이스라엘군 철수선)을 “새로운 국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엔 통합식량안보단계(IPC)는 가자지구에 기근 종식됐다고 판단했지만, 여전히 8명 중 한 명이 굶주리며 향후 4개월간 160만명이 기아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했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의 학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휴전이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대량학살을 은폐하는 연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현재 미국 주도로 가자지구 2단계 휴전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20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의 실질적 복원을 빼놓는 휴전은 의미가 없다. 언제까지 가자지구를 삶과 동떨어진 참상 속 평행우주에 가둘 셈인가.
이영경 국제부 차장 |
☞ ‘이스라엘 제노사이드’에 움직이는 국제사회
https://weekly.khan.co.kr/article/202509261502001
☞ 겨울 폭풍이 강타한 가자지구···8개월 아기 저체온증으로 사망
https://www.khan.co.kr/article/202512121548001
☞ 이스라엘 박격포 공격으로 10여명 부상···‘죽음의 선’ 된 휴전선
https://www.khan.co.kr/article/202512181623001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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