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중앙일보 언론사 이미지

'케네디센터'에 이름 얹은 트럼프…케네디家 분노 "곡괭이 들것"

중앙일보 김형구
원문보기

'케네디센터'에 이름 얹은 트럼프…케네디家 분노 "곡괭이 들것"

서울맑음 / -3.9 °
미국 수도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공연장 ‘케네디센터’ 명칭을 ‘트럼프-케네디센터’로 변경하기로 결정한 지 하루 만인 지난 19일(현지시간) 건물 외벽에 ‘도널드 트럼프’라는 글자가 새겨지자 케네디 가문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발단은 지난 18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고 자신이 임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케네디센터 이사회가 센터 명칭을 ‘도널드 J 트럼프 및 존 F 케네디 기념 공연예술센터’로 변경하기로 의결하면서 시작됐다. 이사회 측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년간 센터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노후 시설을 재건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조카이자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부 장관의 여동생인 케리 케네디 변호사가 19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엑스(X)에 문화예술 공연장 케네디센터 명칭을 ‘트럼프-케네디센터’로 변경하는 것에 반발하며 건물 외벽 공사 사진과 함께 올린 글. 케리 변호사는 “오늘부터 곡괭이를 들고 (케네디센터) 건물에서 그 글자들을 떼어낼 것”이라고 했다. 사진 케리 케네디 엑스(X) 캡처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조카이자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부 장관의 여동생인 케리 케네디 변호사가 19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엑스(X)에 문화예술 공연장 케네디센터 명칭을 ‘트럼프-케네디센터’로 변경하는 것에 반발하며 건물 외벽 공사 사진과 함께 올린 글. 케리 변호사는 “오늘부터 곡괭이를 들고 (케네디센터) 건물에서 그 글자들을 떼어낼 것”이라고 했다. 사진 케리 케네디 엑스(X) 캡처


이 결정 이후 하루 만에 건물 외벽에 ‘도널드 J 트럼프’라는 글자가 곧바로 새겨졌다. 하지만 ‘초법적 결정’ ‘월권’ 논란이 거세다. 케네디센터는 본래 미국 수도에 웅장한 문화 아크로폴리스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국립문화센터’라는 이름으로 설립이 추진됐었다. 그러다 1963년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을 계기로 연방 의회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름을 딴 센터 건립 법안을 통과시켰고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설립됐다. 1971년 9월 8일 센터가 문을 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케네디 가족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불참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케네디가문 “트럼프 잔여임기 내내 싸울 것”



그런 케네디센터 이름이 갑자기 바뀌자 케네디 가문 사람들은 격분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이자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부 장관의 여동생인 케리 케네디 변호사는 19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 케네디센터의 외벽 공사 사진을 게시하며 “오늘부터 (트럼프 대통령 잔여 재임 기간인) 3년 1개월간 곡괭이를 들고 건물에서 그 글자들을 떼어낼 것”이라고 했다.

미국 워싱턴 DC의 문화예술 공연장 케네디센터 명칭을 ‘트럼프-케네디센터’로 변경하기로 한 이사회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난 20일(현지시간) 센터 앞에서 ‘트럼프는 존 F 케네디가 아니다’고 쓰인 팻말 등을 들어 보이며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DC의 문화예술 공연장 케네디센터 명칭을 ‘트럼프-케네디센터’로 변경하기로 한 이사회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난 20일(현지시간) 센터 앞에서 ‘트럼프는 존 F 케네디가 아니다’고 쓰인 팻말 등을 들어 보이며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케리 케네디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 싸움은 간판 글자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역사를 기념하고 무엇을 공공의 가치로 남길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레거시 정치’에 정면으로 맞설 것임을 밝혔다. 케리는 지난해 8월 미 대선 국면에서 케네디 주니어가 ‘트럼프 지지’ 선언을 하자 “그의 결정은 가족의 가치를 배반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등 케네디 가문을 대표하는 반(反)트럼프 인사다. 케리 케네디의 남동생인 크리스토퍼 케네디도 “모욕과 상해(傷害)는 다르다. 이건 모욕”이라며 반발했다.




“JFK 공항 이름도 바꾸려 할 것”



케네디 전 대통령 조카딸 마리아 슈라이버는 소셜미디어 글을 통해 “다음엔 JFK 공항 이름을 바꾸고, 링컨기념관을 ‘트럼프-링컨 기념관’으로 바꾸고, 또 ‘트럼프-제퍼슨 기념관’ ‘트럼프-스미소니언’으로 바꾸려 할지 모른다. 끝이 없다”고 비판했다.

법적 대응도 시사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종조카로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 출신의 조 케네디 3세는 성명을 통해 “케네디센터는 연방 의회가 법으로 규정한 살아있는 기념물”이라며 “링컨 기념관의 이름을 못 바꾸는 것처럼 센터 이름도 바꿀 수 없다”고 강조했다. 케네디 가문과 민주당은 의회 승인 없이 이사회 결정만으로 이뤄진 명칭 변경은 법률 위반이라는 입장이다. 케네디 전 대통령 외손자로 연방 하원의원 출마를 준비 중인 잭 슐로스버그 역시 기관명 변경을 금지하는 법률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이번 결정의 법적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 입각한 케네디 주니어 장관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아들 더글러스 케네디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불쾌하지 않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 일부를 뺀 케네디 가문의 절대다수는 명칭 변경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진보의 아이콘’ 버니 샌더스 무소속 상원의원이 “현직 대통령 이름을 딴 연방 건물 명칭을 금지하는 법안을 곧 발의할 것”이라며 케네디 가문에 힘을 보태고 나섰다. 센터 명칭 변경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난 20일 건물 앞에서 ‘트럼프는 존 F 케네디가 아니다’고 쓰인 팻말 등을 들어 보이며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트럼프, 센터 장악 후 재단장…보수단체들 행사



36명 내외로 구성되는 케네디센터 이사회는 설립 당시부터 공화ㆍ민주 양당이 함께 참여하는 초당적 협의체를 전제로 하는 등 그간 당파적 성향과는 거리가 먼 문화 시설로 운영돼 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본인이 이사장을 맡고 민주당 소속 이사들을 해임한 뒤 그 자리를 충성파로 채웠으며 최측근 리처드 그레넬 전 주독일대사를 사무총장에 앉히는 등 대대적인 물갈이에 나섰다. “좌파 인사들이 이념화시킨 센터를 바로잡겠다”면서다.


이후 케네디센터는 면모가 완전히 바뀌었다. 외벽 도색 및 대리석 작업 등 전면적인 재단장에 들어간 것은 물론 9월 청년 보수 운동가 찰리 커크 추모 행사, 10월 미국보수연합재단 행사 등 보수 우파 성향 정치 행사로 무대가 채워졌다.



NYT “트럼프 ‘브랜딩’에 집착”



지난 5일에는 이곳에서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조추첨 행사가 열렸고 여기에 직접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이 초대 ‘FIFA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장악한 공화당은 케네디센터 공연장 오페라하우스의 명칭을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트럼프 오페라하우스’로 바꾸기 위한 입법 절차도 추진 중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평생 ‘브랜딩’에 집착해 온 트럼프는 미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였던 케네디의 이름 위에 자신의 이름을 얹었다”며 “이는 단순한 개칭이 아니라 브랜드를 장악하려는 행위”라고 짚었다. 미국 현대사에서 엘리트 진보를 상징하는 케네디 가문과 현직 권력인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이번 싸움은 법정 공방을 넘어 정치적 대립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