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키워온 항저우, 6소룡은 어떻게 탄생했나
중국 창업 생태계에서 항저우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 있다. "큰 나무를 옮겨심기보다, 이 도시는 씨앗을 키우는 것을 선호한다." 딥시크, 유니트리, 브레인코 등 '항저우 6소룡'이 글로벌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이 도시는 어떻게 씨앗을 키웠을까.
2003년, 씨앗을 심다
이야기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진핑 저장성 당서기가 시작한 '디지털 저장' 이니셔티브는 625억 위안(약 12조 원)의 인프라 투자와 함께 오늘의 토대를 놓았다. 이 시기의 디지털 인프라 투자가 항저우가 경쟁 도시들보다 앞서 나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보다 2년 앞선 2001년, 항저우는 중국 최초로 해외 유학파 창업 지원 정책을 도입했다. 20년간 지원 영역을 20개 이상으로 확대해 거주, 주거, 사회보험, 자녀 교육, 출입국, 사업자 등록, 특허 신청까지 창업과 일상생활 전 과정을 포괄하는 '풀체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금까지 3억 3,000만 위안(약 660억 원)으로 1,186개 해외 인재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보스턴에서 찾아낸 브레인코
2015년, 하버드대 뇌과학센터 박사과정 중이던 한비청(韩璧丞)은 하버드 인근 단독주택 지하실에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스타트업 브레인코를 시작했다. 2018년, 항저우시 위항구(余杭區) 미래과기성 대표단이 1만 2,000km를 날아 보스턴의 브레인코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그해 말, 하버드와 MIT 출신 박사들이 보스턴에서 항저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브레인코는 2018년 12월 저장성에 법인을 설립했다.
게임사이언스 창업자 펑지(冯骥)가 항저우 시후구(西湖區) 이촹타운에 처음 왔을 때, 타운 관리위원회는 사무실을 확보해주고 3년간 임대료를 전액 면제했다. 이후 '검은 신화: 오공'이 글로벌 게임 시장을 휩쓸었을 때, 항저우시는 게임사이언스가 필요로 할 경우를 대비해 3년간 두 개 건물을 비워뒀다.
3일 실사, 7일 자금 집행
항저우시는 정부 보증 펀드를 통해 초기 스타트업의 자금 위기에 신속 대응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일반적인 실사 기간이 수 주에서 수 개월 걸리는 것과 달리, 항저우는 3일 실사, 7일 내 자금 집행을 원칙으로 한다. 2018년 유니트리가 현금 흐름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시스템을 통해 2,000만 위안(약 40억 원)을 지원받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보조금 지급 속도도 빠르다. AI 스마트 안경 기업 로키드에 따르면, 시 보조금 프로그램 조건 충족 후 온라인 신청하면 8분 만에 300만 위안(약 6억 원)이 입금된다. 항저우시는 단일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보조금 신청부터 지급까지 전 과정을 자동화했다.
항저우 정부는 '(창업자의 요청에) 대응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다.
관료 30명이 위챗 친구
캐나다 출신 VR 스타트업 FXG의 닉 미첼(Nikk Mitchell) CEO는 10여 년 전 항저우에 왔다. 현재 항저우 창업단지 멍샹샤오전(梦想小镇, 드림타운)에서 회사를 운영 중인 그는 위챗에 정부 관계자 30명 이상을 친구로 두고 있다고 밝혔다. 항저우시 공무원들은 관할 구역 내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위챗으로 직접 연결된다. 창업자의 성과가 담당 공무원의 실적 평가에 반영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창객천하': 11년간 1만 2,000개 프로젝트
2015년부터 시작된 '창객천하(创客天下)' 해외 고급인재 창업대회는 항저우의 글로벌 인재 유치 전략의 핵심이다. 11년간 30개국 이상에서 1만 2,00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참가했고, 400개 가까이가 항저우에 법인을 설립했다. 대회 우승자에게는 최대 2,000만 위안(약 40억 원)의 정책 지원이 주어진다.
항저우에서 구직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7일간 무료 숙박이 제공된다. 고급인재로 인정되면 주택 보조금 최대 800만 위안(약 16억 원), 월 임대료 보조 최대 5,000위안(약 1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35세 이하 대졸자가 항저우에서 취업하면 호구(戶口)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三个15%의 원칙
항저우시는 '三个15%(세 개의 15%)' 과학기술 투자 정책을 시행한다. 시 재정 과학기술 지출 연평균 증가율 15% 이상, 신규 재력의 15% 이상을 과학기술에 투입, 산업정책 자금의 15%를 신질생산력(新质生产力)에 집중하는 원칙이다. 2025년 산업정책자금은 전년 490억 위안에서 502억 위안(약 10조 원)으로 증액됐다. 항저우시 발개위는 "딥시크, 유니트리 같은 혁신 기업을 더 많이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야오가오위안(姚高员) 항저우시장은 기업인 조찬회에서 "포용십년불명, 정대일명경인(包容十年不鸣, 静待一鸣惊人)—10년간 울지 않아도 포용하고, 한 번 울어 세상을 놀라게 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정착률 3%
물론 모든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창객천하에 참가한 1만 2,000개 프로젝트 중 항저우에 뿌리내린 것은 400개에 불과하다. 정착률 3%다. 브레인코, 유니트리, 게임사이언스는 살아남은 소수다. 베이징과 선전이 대기업과 국가급 연구소를 앞세울 때, 항저우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항저우가 20년간 구축한 시스템—해외까지 찾아가는 인재 유치, 7일 내 자금 집행, 관료와 창업자의 직접 소통망—은 '6소룡'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큰 나무를 이식하면 빨리 그늘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씨앗을 키우면 그 땅에 뿌리를 내린 숲이 된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유니콘 몇 마리'를 넘어 '숲'을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한 사례다.
글 : 조상래(xianglai@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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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미래과기성 국제인재파크 |
중국 창업 생태계에서 항저우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 있다. "큰 나무를 옮겨심기보다, 이 도시는 씨앗을 키우는 것을 선호한다." 딥시크, 유니트리, 브레인코 등 '항저우 6소룡'이 글로벌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이 도시는 어떻게 씨앗을 키웠을까.
2003년, 씨앗을 심다
이야기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진핑 저장성 당서기가 시작한 '디지털 저장' 이니셔티브는 625억 위안(약 12조 원)의 인프라 투자와 함께 오늘의 토대를 놓았다. 이 시기의 디지털 인프라 투자가 항저우가 경쟁 도시들보다 앞서 나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보다 2년 앞선 2001년, 항저우는 중국 최초로 해외 유학파 창업 지원 정책을 도입했다. 20년간 지원 영역을 20개 이상으로 확대해 거주, 주거, 사회보험, 자녀 교육, 출입국, 사업자 등록, 특허 신청까지 창업과 일상생활 전 과정을 포괄하는 '풀체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금까지 3억 3,000만 위안(약 660억 원)으로 1,186개 해외 인재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보스턴에서 찾아낸 브레인코
2015년, 하버드대 뇌과학센터 박사과정 중이던 한비청(韩璧丞)은 하버드 인근 단독주택 지하실에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스타트업 브레인코를 시작했다. 2018년, 항저우시 위항구(余杭區) 미래과기성 대표단이 1만 2,000km를 날아 보스턴의 브레인코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그해 말, 하버드와 MIT 출신 박사들이 보스턴에서 항저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브레인코는 2018년 12월 저장성에 법인을 설립했다.
게임사이언스 창업자 펑지(冯骥)가 항저우 시후구(西湖區) 이촹타운에 처음 왔을 때, 타운 관리위원회는 사무실을 확보해주고 3년간 임대료를 전액 면제했다. 이후 '검은 신화: 오공'이 글로벌 게임 시장을 휩쓸었을 때, 항저우시는 게임사이언스가 필요로 할 경우를 대비해 3년간 두 개 건물을 비워뒀다.
3일 실사, 7일 자금 집행
항저우시는 정부 보증 펀드를 통해 초기 스타트업의 자금 위기에 신속 대응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일반적인 실사 기간이 수 주에서 수 개월 걸리는 것과 달리, 항저우는 3일 실사, 7일 내 자금 집행을 원칙으로 한다. 2018년 유니트리가 현금 흐름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시스템을 통해 2,000만 위안(약 40억 원)을 지원받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보조금 지급 속도도 빠르다. AI 스마트 안경 기업 로키드에 따르면, 시 보조금 프로그램 조건 충족 후 온라인 신청하면 8분 만에 300만 위안(약 6억 원)이 입금된다. 항저우시는 단일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보조금 신청부터 지급까지 전 과정을 자동화했다.
항저우 정부는 '(창업자의 요청에) 대응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다.
관료 30명이 위챗 친구
캐나다 출신 VR 스타트업 FXG의 닉 미첼(Nikk Mitchell) CEO는 10여 년 전 항저우에 왔다. 현재 항저우 창업단지 멍샹샤오전(梦想小镇, 드림타운)에서 회사를 운영 중인 그는 위챗에 정부 관계자 30명 이상을 친구로 두고 있다고 밝혔다. 항저우시 공무원들은 관할 구역 내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위챗으로 직접 연결된다. 창업자의 성과가 담당 공무원의 실적 평가에 반영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창객천하': 11년간 1만 2,000개 프로젝트
2015년부터 시작된 '창객천하(创客天下)' 해외 고급인재 창업대회는 항저우의 글로벌 인재 유치 전략의 핵심이다. 11년간 30개국 이상에서 1만 2,00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참가했고, 400개 가까이가 항저우에 법인을 설립했다. 대회 우승자에게는 최대 2,000만 위안(약 40억 원)의 정책 지원이 주어진다.
항저우에서 구직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7일간 무료 숙박이 제공된다. 고급인재로 인정되면 주택 보조금 최대 800만 위안(약 16억 원), 월 임대료 보조 최대 5,000위안(약 1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35세 이하 대졸자가 항저우에서 취업하면 호구(戶口)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三个15%의 원칙
항저우시는 '三个15%(세 개의 15%)' 과학기술 투자 정책을 시행한다. 시 재정 과학기술 지출 연평균 증가율 15% 이상, 신규 재력의 15% 이상을 과학기술에 투입, 산업정책 자금의 15%를 신질생산력(新质生产力)에 집중하는 원칙이다. 2025년 산업정책자금은 전년 490억 위안에서 502억 위안(약 10조 원)으로 증액됐다. 항저우시 발개위는 "딥시크, 유니트리 같은 혁신 기업을 더 많이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야오가오위안(姚高员) 항저우시장은 기업인 조찬회에서 "포용십년불명, 정대일명경인(包容十年不鸣, 静待一鸣惊人)—10년간 울지 않아도 포용하고, 한 번 울어 세상을 놀라게 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정착률 3%
물론 모든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창객천하에 참가한 1만 2,000개 프로젝트 중 항저우에 뿌리내린 것은 400개에 불과하다. 정착률 3%다. 브레인코, 유니트리, 게임사이언스는 살아남은 소수다. 베이징과 선전이 대기업과 국가급 연구소를 앞세울 때, 항저우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항저우가 20년간 구축한 시스템—해외까지 찾아가는 인재 유치, 7일 내 자금 집행, 관료와 창업자의 직접 소통망—은 '6소룡'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큰 나무를 이식하면 빨리 그늘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씨앗을 키우면 그 땅에 뿌리를 내린 숲이 된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유니콘 몇 마리'를 넘어 '숲'을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한 사례다.
글 : 조상래(xianglai@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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