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자 조금은 생뚱맞게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가 생각난다. 물론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실행을 하지 못한 어떤 계획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기다리고 기다리다 끝내 무너지고 만 김소월의 ‘님’이라든가, 보내지는 않았지만 떠나버린 한용운의 ‘님’이 우리 근대시(영혼)의 원형 같은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철학은, 범박하게 말하는 게 용서된다면,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예술을 자기의 ‘님’으로 삼았기에 그렇게 깊고 방대해졌는지 모른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서 자신의 역량만큼 물을 길어왔다.
편리를 위해 노동자가 죽는 시대
그것이 때로는 낭만적인 자기 서사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했고 위험한 정치 사상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를 오판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시대를 역사의 지평 위에 올바로 올려놓는 일은 과연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고 지레 포기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샘물일지에 대해서 세세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떠나버린 혹은 사라져버린 ‘님’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외침에는 점점 납작해지는 문학뿐만 아니라 정신의 목마름을 축여줄 가치가 충분히 담겨 있다. 각자 분가해서 살던 숙모 계희영을 집안 혼인 잔치에서 만나자 ‘저는 꿈을 깨면 못 삽니다’라며 서럽게 울었다는 김소월의 예는, 김소월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실존과도 연결된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 지지부진한 시적 성과는 바로 이 ‘꿈’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용운의 시는 시인보다는 사상가의 것이라 김소월과 직접 비교는 어색하지만, 역시 한용운 자신의 꿈과 매우 밀접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존재를 존재(sein) 안에 세워놓는 언어를 갖는 이는 시인과 사유하는 사람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님을 향한 시를 쓴 우리 시인들을 떠올려 보면 수긍할 만한 주장이다.
편리를 위해 노동자가 죽는 시대
그것이 때로는 낭만적인 자기 서사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했고 위험한 정치 사상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를 오판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시대를 역사의 지평 위에 올바로 올려놓는 일은 과연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고 지레 포기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샘물일지에 대해서 세세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떠나버린 혹은 사라져버린 ‘님’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외침에는 점점 납작해지는 문학뿐만 아니라 정신의 목마름을 축여줄 가치가 충분히 담겨 있다. 각자 분가해서 살던 숙모 계희영을 집안 혼인 잔치에서 만나자 ‘저는 꿈을 깨면 못 삽니다’라며 서럽게 울었다는 김소월의 예는, 김소월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실존과도 연결된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 지지부진한 시적 성과는 바로 이 ‘꿈’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용운의 시는 시인보다는 사상가의 것이라 김소월과 직접 비교는 어색하지만, 역시 한용운 자신의 꿈과 매우 밀접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존재를 존재(sein) 안에 세워놓는 언어를 갖는 이는 시인과 사유하는 사람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님을 향한 시를 쓴 우리 시인들을 떠올려 보면 수긍할 만한 주장이다.
올해 쿠팡에서 배달 업무를 하던 노동자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언가 기다렸다는 듯 이 한 사업장에서 동일한 사고가 잇따른 것은 충격적인 일이며 우리가 사는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돌아보게 한다. 미리 단언하자면, 이것은 단지 노동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위기를 가리키는 급박한 경보에 가까울 것이다. 쿠팡의 고객정보가 속칭 다 털렸는데도 대규모 ‘탈팡’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고, 도리어 구직 지원자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태는 우리를 암울하게 하는 동시에 쿠팡이라는 괴물을 과연 국가의 행정력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게 한다. 혹 정부가 쿠팡에 제재를 가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세금을 물리는 주식 소득의 기준을 낮추겠다고 하자 저항 움직임이 일지 않았던가. 아무튼 쿠팡 현상은 경제적 문제나 노동의 문제를 넘어서는 영역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님’을 섬기는 꿈꾸는 존재가 돼야
우스개로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에는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고향이 서울인 사람은 가벼운 콤플렉스를 겪었다고 한다. 문학이라는 것이 어쩐지 고향이 있거나 고향을 어쩔 수 없이 떠난 사람만이 하는 것 같았다는 말인데 이 우스개가 가볍지 않은 것은 문학이라는 것이 ‘그리움’이나 ‘꿈’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문학의 언어는 그리움의 언어이거나 꿈의 언어라는 뜻일 것이며, 생각의 도약을 한 번 더 해보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들 속에서 생성된다는 의미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 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은 급속한 근대화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서 강제적으로 떠나야 했던 역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아 있는 존재들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현실에서는 부대낌이고 갈등이지만 그러면서도 찾아가는 조화이거나 공화(共和)의 세계가 아닐까? 즉 더 좋은 세계 말이다. 근대사라는 것은 기실 이것들의 파괴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쿠팡은 살아 있는 것들과의 연결을 끊어내고 오로지 개별적인 편리만을 주입시킨 극단적인 사례다. 이제 극단적인 편리가 상품이 되었고, 이 상품의 생산을 위해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다. 너무도 낯익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시가 얼마나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거대 자본이 투입된 프로그램인 AI를 인간 존재보다 위에 두는 망언들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지는 현실에서 과연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님의 침묵’)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해 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羊”(‘군말’)임을 먼저 깨달아야 꿈을 꾸는 존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꾸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님’을 섬기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일 테다.
황규관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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