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매일경제 언론사 이미지

[세상사는 이야기] 젊은 군인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웠다

매일경제
원문보기

[세상사는 이야기] 젊은 군인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웠다

속보
푸틴 "러시아의 중장기 안보 보장되면 즉각 종전"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2025년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가 출범한 지도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여전히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의 밤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물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이 진행돼 시시비비를 정의롭게 가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굳게 믿고 기도한다.

나는 학창 시절 시내에서 갑자기 탱크부대가 지축을 울리며 광화문 쪽으로 달려가고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는 뉴스를 들었던 적이 있다. 비상계엄하의 정국은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정당·정치 활동은 금지되고 국회는 폐쇄됐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당시 서울에서는 흉흉한 소문만 들릴 뿐, 국민 대부분은 참혹한 광주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비상계엄 시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처참히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것을 체험했다. 헌법이 수정되고 집회는 제약을 받았으며 언론도 사전 검열이 이뤄져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그러는 동안 많은 젊은이와 시민이 구금돼 고문에 시달렸으며 목숨을 잃었다. 한 줌의 인권 보호도 받지 못하는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현재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린 희생의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계엄이란 단어는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트라우마이자 입에 올리기 싫은 공포의 금기어였다.

지난해 12월 3일 밤, 45년 만에 계엄이 선포됐을 때 나처럼 '포털 사이트에도 이젠 거짓 뉴스가 나오네'라고 했던 이가 많았을 것 같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최종 선고문에서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고 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는 계엄에 학습 효과가 있고 국민들 안에는 지속적인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한 경험이 녹아 있다. MZ세대 군인들은 과거처럼 불법적인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지난해 계엄 선포 후 국회에 처음 투입된 최정예 군인들의 전투력으로는 마음만 먹었다면 몇십 분 만에 국회가 완전히 장악됐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군인들은 주저했고, 현장 지휘관들은 지혜롭게 대처했다. 모든 역사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만약 그날 밤 총소리 한 방만 울렸으면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군경과 시민 수천 명이 뒤엉켜 몸싸움을 벌인 그날 밤 큰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도 기적이다. 헬기를 타고 적진이 아니라 국회에 내린 군인들은 시민들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재판정에서 한 젊은 장교가 "우리 군인은 특정 권력의 사병이 아니고, 우리의 군복은 국민을 위해 입는 수의(壽衣)"라고 한 대목은 마음을 울리고 믿음직하며 대견하다.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해줘 고맙다.

인공지능(AI)이 주도하게 될 미래에도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윤리와 책임, 더 높은 가치 추구라고 한다. 생각을 더 깊이 더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과학 발달의 결과인 문명의 도구가 사람에게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방송에서 "과거와는 다르게 젊은 군인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운다"는 사회자의 말에 더욱 공감이 간다. 나는 정치에 문외한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보·보수·중도 성향은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며 서로 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 생각한다. 정파와 이념은 달라도 국가와 국민 보호를 사명으로 하는 젊은 군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대치하는 불행한 일은 앞으로 절대 없어야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