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정해진 세금을 내는 것은 국가에 대한 의무이기 이전에 시민들이 서로 맺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계약이다. 그러나 여기, 무려 4,300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내지 않고 14년째 버티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인 선박왕이라고 불리는 시도해운 권혁 회장의 이야기다. 권혁 회장이 안 내고 있는 세금 4,368억 원은 평균적인 납세자 21만 명의 1년치 소득세에 해당한다. 한 개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메꾸기 위해 21만 명이 필요했던 셈이다.
무려 21만 명이 단 한 사람을 떠받쳐야 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대한민국의 조세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은 어디서 어떻게 구멍이 났을까. 이 거대한 부정의를 그냥 두고만 봐야하는 것일까.
뉴스타파는 지난 주부터 시도해운 권혁 회장의 사례를 통해 대한민국의 조세 정의를 되묻는 ‘법 위의 선박왕’ 연속 보도를 시작했다. 오늘은 네 번째 보도다.
① 하루 70억 원 버는데... 세금 4천억 안내고 버텼다
② 50만분의 1 확률과 줄어든 세금 1,300억 원
③ 자산 · 소득 0원으로 생활? 수십 억 횡령 증거 포착
④ '4천 억 세금 소송' 권혁, 천억 대 자금 국내 유입 확인
앞선 <법 위의 선박왕> 보도에서 뉴스타파는 지난 2011년 4,368억 원의 세금을 부과받은 시도해운 권혁 회장이 14년 동안 이어진 소송 과정에서 무려 1,300억 원 가량의 세금을 줄일 수 있었던 사실, 그리고 국내에 자산과 소득이 0원이라며 주장하고 있는 권혁 회장이 회삿돈 수십억 원을 횡령한 물증 등을 보도했다.
국세청은 권혁 회장 소유로 드러난 일부 페이퍼 컴퍼니의 국내 자산에 압류를 걸어 둔 상태지만 다 추징한다해도 여전히 2,000억 원의 세금은 받아내기 어려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뉴스타파는 권혁 회장이 해외 법인에 있던 돈 1,000억 원을 국내로 들여와 부동산 등에 투자한 사실을 확인했다.
문수원 추징 막고 있는 의문의 페이퍼 컴퍼니
앞서 3편에서 보도했듯 서울 구기동에 있는 문수원은 권혁 회장 일가가 실소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권혁 회장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중공업으로 하여금 이 사찰에 수천만 원을 기부하도록 했고, 관련된 불교 법인에는 수억 원을 기부하도록 했다.
문수원의 등기부 등본을 보면, 법적 소유자는 멜보 인터내셔널이라는 홍콩 페이퍼 컴퍼니로 되어 있다. 복잡한 구조로 위장을 해두었지만 실소유자는 권혁 회장이라는 게 이미 드러난 회사다.
국세청은 지금까지 이 사찰을 여러차례 압류했지만 추징에는 실패하고 있다. 가장 최근 압류한 것은 올해 8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은 지 1년 뒤다.
그런데 실제로는 국세청이 이 압류를 통해 추징 조치를 하기 어렵다. 등기상 앞선 순위에 매매 예약 가등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등기부 등본을 보면 2017년 11월 위너스텝 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가 매매 예약을 하고 그 사실에 대해 가등기를 해두었다. 국세청 압류보다 이 매매예약 가등기가 순위가 앞서기 때문에 이 가등기에 따라 실제 매매가 이루어지면 국세청의 압류는 무효가 된다. 즉 국세청이 추징을 하려고 할 때 이 매매 예약에 따라 매매를 하면 국세청의 압류 추징을 방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권혁 일가가 소유한 문수언 사찰의 등기부 등본. 국세청이 압류를 걸기 전 위너스텝이라는 홍콩 회사가 매매예약을 이유로 가등기를 걸어두었다.
위너스텝, 다른 권혁 회사와 ‘샴 쌍둥이”
뉴스타파는 위너스텝 인베스트먼트가 홍콩 당국에 제출한 연차 보고서를 확인했다. 확인 결과 위너스텝 인베스트먼트는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였다. 발행된 주식은 단 1주였고, 자본금은 1 홍콩 달러였다. 우리 돈으로 190원 정도다.
그런데 수상한 점이 발견됐다. 이 회사의 주소는 홍콩의 주요 상업지역 중 하나인 데 부 센트럴가 19번지에 있는 월드 와이드빌딩 20층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주소는 이미 권혁 회장의 소유로 밝혀진 멜보 인터내셔널과 호수까지 완전히 똑같다. 멜보 인터내셔널 뿐 아니라 권혁 회장이 소유한 또다른 회사, 시도쉬핑도 주소가 호수까지 똑같다.
위너스텝과 멜보, 시도쉬핑의 연차 보고서. 세 회사의 주소는 모두 동일하다.
더 결정적인 정황은 세 회사의 이사진이 겹친다는 것이다.
위너스텝의 이사는 마츠오 히로카츠와 쿠로사와 이츠로라는 일본인이다. 그런데 멜보인터내셔널의 유일한 이사가 마츠오 히로카츠다. 시도 쉬핑의 이사진에는 마츠오 히로카츠와 쿠로사와 이츠로가 둘 다 등재되어 있다.
위너스텝 → 계성 중공업으로 109억 원 유입
본론은 이제부터다. 뉴스타파는 권혁 회장 소유로 강하게 의심되는 이 위너스텝으로부터 국내로 돈이 들어 온 자금 흐름을 포착했습니다. 전체 액수는 무려 천억 원이 넘는다.
우선 하나씩 살펴보자. 이번 보도의 주요 제보자인 최관순 씨는 지난 2021년 8월 17일 계성중공업이라는 법인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대상중공업 인근에 있는 반도산업이라는 선박 부품 회사를 인수하기 위한 법인이었다. 법인 설립에 들어간 자본금은 9억 원, 그런데 이 돈을 보낸 것은 바로 홍콩에 있는 위너스텝이었다.
제가 계성중공업에 대한 업무도 봤었기 때문에 그 들어오는 과정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거죠. 개성중공업 등기를 제가 했거든요. 법인 설립 등기를. 위너스탭에서 저한테 아포스티유(위임장)를 써주면 그걸 가져와서 법무사 사무실에 가지고 가서 제가 설립 등기를 했거든요.알 수밖에 없죠. 법인 설립 때 필요했던 돈, 처음에 주금 납부용으로 해서 9억 원을 가져옵니다.그리고 이틀 뒤인 8월 19일에는 계성중공업 법인 통장에 추가로 인수 자금 100억 원이 들어왔다. 돈을 보낸 곳은 이번에도 위너스텝 이었다.
- 최관순 / 대상중공업 전 부사장
권혁 거주지 밑에 우리은행이 있거든요. 아크로비스타 지하에 우리은행이 있어요.우리은행 아크로피스타 지점 지하에 가서 그쪽 부지점장님 통해서 그 자금 받는 걸 제가 같이 가서 했었거든요.물증도 있다. 홍콩 위너스텝 인베스트와 계성중공업이 맺은 대출 계약서다.
- 최관순/대상중공업 전 관리이사 겸 부사장
홍콩 위너스텝과 계성중공업이 맺은 대출 계약서. 이자율 0%에 거치기간이 5년이나 되는 파격적인 조건이다.
위너스텝 홍콩 → 위너스텝 코리아로 800억 원 유입
한 달 뒤인 2021년 9월 10일 한국에 위너스텝 인베스트먼트 코리아라는 법인이 설립된다. 이 법인 설립 자금은 대상중공업으로부터 나왔다. 대상중공업에서 나온 자금 10억 원이 문수원을 거쳐 세탁된 뒤 위너스텝코리아의 설립 자금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고 2021년 12월, 홍콩 위너스텝이 이 위너스텝 코리아에 무려 800억 원의 자금을 대출해준다. 뉴스타파가 확보한 대출 계약서를 보면 대출금액은 한화로 800억 원, 이자는 연 2%였다. 거치 기간은 60개월, 즉 5년으로 되어 있다.
홍콩 위너스텝이 위너스텝 코리아에 800억 원을 대출해준 계약서.
위너스텝 코리아 설립 자금을 직접 대출해줬던 대상중공업 부사장 최관순 씨는 위너스텝 코리아가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을 위해 설립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이라고 불리던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은 천문학적 개발 이익이 예상되는 사업으로 수십년 동안 수많은 투기꾼들이 군침을 흘리던 사업이었다. 권혁 회장이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을 위해 함께 동업하기로 한 정 모 씨는 구룡마을 개발 구역 토지의 개발권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실제로 위너스텝 인베스트먼트 코리아의 등기부 등본을 보면 권혁 회장의 측근이자 대상중공업 대표였던 손 모 씨와 구룡마을 개발권을 가진 정 씨의 아들이 함께 이사로 등재되어 있다. 권혁 측과 정 모 씨측의 공동 경영 체제였던 것이다.
뉴스타파는 위너스텝 코리아 내부 인사들끼리 대화하는 녹음 파일을 하나 입수했다. 권혁 회장의 측근이자 대상중공업 및 위너스텝 코리아 대표를 겸임하고 있던 손 모 씨와 구룡마을 개발권을 가진 정 모 씨, 그리고 그 아들 정 모 씨 세 사람이 대화하는 녹음 파일이다. 대화가 이루어진 날짜는 2023년 3월 19일이다.
아들 정 모 씨 : 그 255억이 남았다는 거야?대화의 전반부에 나오는 숫자는 돈의 액수로 보인다. 이들의 말하는 돈의 액수, 즉 255억과 400억, 145억을 모두 합하면 정확히 800억 원, 즉 권혁 회장의 위너스텝으로부터 들어온 액수와 일치한다. 대화의 후반부에서 이들은 대출받은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할 경우 권혁 회장이 형사 고발을 할 거라고 예측하며 걱정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들 모두가 위너스텝 홍콩에서 대출한 돈이
손 모 씨 : 아 240…아 255억인가 아마 그렇게 남았어
아들 정 모 씨 : 그렇겠죠. 딱 400개였었습니다.
손 모 씨 : 응
아들 정 모 씨 : 145개를 유치하셨다고 하지만…
아버지 정 모 씨 : 돈이 언제쯤 회수된다, 이렇게 설명해 가지고 본인이 납득을 하면 관계가 없는데, 만약에 납득 안하고 형사 고발 문제 나오면 그럼 되든 안 되든 권혁이는 형사고발할 거다. 그런 얘기지.
손 모 씨 : 100% 그 사람 합니다. 100% 해요.
- 위너스텝 코리아 내부 관계자들 사이의 대화 녹취 중 (2023.3.19)
권혁 회장의 돈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것으로 권혁 회장의 해외 자금 800억 원이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위너스텝 → 르네상스레저로 149억 원 유입
같은 방식으로 골프장 개발 사업을 하는 르네상스 레저라는 곳에도 거액이 흘러 들어갔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대출 계약서를 보면 홍콩 위너스텝인베스트는 르네상스 레저에 2021년 12월 17일자로 5년 동안 149억 원을 0.5%의 금리로 빌려줬다.
위너스텝 홍콩이 르네상스 레저에 149억 원을 빌려준 대출 계약서. 역시 대출 금리 0.5%의 파격적인 조건이다.
이제 국내로 유입된 권혁 회장의 돈을 전부 정리해보자.
1. 계성 중공업 설립 등에 109억 원
2. 위너스텝 코리아에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 명목으로 800억 원
3. 르네상스 레저에 골프장 개발 사업 명목으로 149억 원
세 가지를 모두 합하면 2021년 8월에서 12월 사이 홍콩 페이퍼컴퍼니인 위너스텝 인베스트를 통해 국내로 들어온 권혁 회장의 돈은 모두 1,058억 원이다. 국내에는 자산도 소득도 0원이라 4,300억 원의 세금을 낼 돈이 없다며 14년 동안 소송을 벌여왔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법인의 회삿돈 수십억 원을 쌈짓돈처럼 꺼내 쓰며 횡령한 권혁 회장이 정작 더 많은 돈을 벌 투자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해외에 있는 금고에서 무려 천억 원이 넘는 돈을 꺼내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짧은 기간 해외에서 그렇게 큰 외화가 들어왔는데 국내의 금융당국이나 과세 당국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제가 보기엔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알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외화가 신고돼서 들어오는 통로가 항상 똑같아요. 어디냐 하면 권혁 거주지 밑에 우리은행이 있거든요. 아크로비스타 지하에 우리은행이 있어요. 항상 그쪽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자금을 보내는 쪽 홍콩이 있고 그쪽에서 작업을 해서 돈을 보내면 한국에서는 한00이라는 그 시도시핑 영업소의 대표이사 겸 대상중공업의 감사가 그 돈을 받아서 처리합니다. 그러니까 그 돈이 들어오는 통로가 너무 뻔한 거죠. 그러면 솔직히 쉽게 생각하면 우리은행 아크로비스타 지점에 거액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파악해도 돈 들어오는 거 다 알 수 있죠. - 최관순/대상중공업 전 관리이사 겸 부사장
그런데 이런 국세청의 ‘무능’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뉴스타파는 권혁 회장이 자신의 세금 추징을 담당했던 국세청을 매수한 정황과 증거를 포착했다. 권혁 회장의 공무원 매수 정황은 다음 주, <법 위의 선박왕> 5편에서 이어 보도한다.
뉴스타파 심인보 inbo@newstapa.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