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진압에 투입을 명령받았지만 이를 거부한 쉬친셴 장군이 1990년 3월17일 비공개 군사재판을 받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
“나는 이것이 대규모 정치적 사건이고, 주로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위 진압에)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위수부대와 공안, 무장 경찰이면 충분하다고 봤다. 군을 배치해야 한다면 베이징 외곽으로 이동시키는 게 좋겠다고 (지휘관에) 말했다.”
36년 전인 1989년 5월20일 중국 국무원은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열린 베이징에 계엄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이틀 전인 18일 군 지휘부인 중앙군사위원회는 1만5천명 규모의 38집단군을 이끄는 쉬친셴 장군에게 베이징 진입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따르기를 거부했다. 1990년 3월17일 쉬 장군의 명령 불복종 사건에 대한 비공개 군사재판이 열렸다. 6시간짜리 재판 영상은 지난 11월 말 유튜브에 처음으로 올라왔지만, 누가 어떤 경로로 처음에 올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7일(현지시각) 미국 뉴욕타임스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이 병력을 베이징으로 투입하기로 준비하던 과정에서 군 내부에 존재했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영상에서 쉬 장군은 재판부를 향해 “이 일을 잘 수행하면 공적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역사 속의 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 투입 문제를 두고 “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격)에서도 토론을 해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톈안먼(천안문) 시위에 참여한 뒤 대만으로 건너간 역사학자 우런화는 “쉬 장군의 불복종은 6·4 사건(톈안먼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의 결정적 순간이었지만, 이 영상이 나오기 전까지는 많은 세부 사항이 불분명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는 특히 무기를 들고 민간인이 다수인 시위대로 향하는 것에 저항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쉬 장군은 “명령을 듣는 중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무기와 장비를 휴대하라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계엄 선포 15일 뒤인 6월3일 밤부터 4일까지 중국군은 무력 진압에 들어갔다. 당시 최대 수천 명의 민간인이 숨지면서 톈안먼 시위는 유혈 사태로 막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해당 영상은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며, 귀중한 사료라고 강조했다. 제러미 브라운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 교수는 “쉬 장군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는 이야기를 읽는 것과 법정에서 앉아 증언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잘못된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한 과정을 설명하는 모습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5년 형을 선고 받은 쉬 장군은 지난 2021년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이정연 특파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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