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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잔인한 인간을 마주하다…‘라이프 오브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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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잔인한 인간을 마주하다…‘라이프 오브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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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동물원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인간이야.” 무대 위에서 이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객석 공기가 눈에 보이듯 무겁게 가라앉는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지에스(GS)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을 시작한 ‘라이프 오브 파이’(내년 3월2일까지)는 인도의 소년 파이(박정민·박강현)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표류기를 빌려 삶과 죽음, 신념과 종교,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작품이다. 2012년 리안 감독의 동명 영화가 눈부신 시지(CG)와 따뜻한 정조로 소년의 성장과 치유를 강조했다면, 무대는 오히려 원작 소설에 더 가까운 층위까지 내려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차갑게 드러낸다.



이 작품은 연극·뮤지컬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장르를 표방한다. 뮤지컬처럼 노래가 극을 끌고 가지는 않지만, 조명·영상·음향·무대미술의 스케일과 감각의 밀도는 대형 뮤지컬에 견줄 만하다. 여기에 주요 등장 캐릭터인 동물(퍼핏)과 이를 조종하는 인형술사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기존 연극과의 차별점이다. 제작사 에스앤코의 신동원 대표는 “무대 예술의 모든 것을 종합해 관객이 경험하게 하는 포맷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범주가 필요했다. 공연장에 오시면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2019년 영국 셰필드 초연 이후 영국 유케이(UK) 시어터 어워즈와 와츠온스테이지상을 거쳐 2022년 로런스 올리비에상 5관왕, 2023년 토니상 3관왕에 오른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특히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움직이는 인형술사들이 올리비에상 남우조연상을 공동 수상하며 “퍼핏도 배우”라는 평가를 끌어냈다.



무대는 얀 마텔의 원작 소설 ‘파이 이야기’에 더 가까워졌다. 소년과 호랑이의 기묘한 동행 뒤에 숨어있던 식인과 포식의 서사가 영화보다 훨씬 생생하게, 그리고 덜 미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구명보트 위에서 얼룩말이 뜯기고, 오랑우탄이 처참하게 사라진다. 영화에서 판타지로 그려졌던 ‘미어캣 섬’은 인간 파이가 무너지는 잔혹한 순간으로 묘사된다.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의 먹잇감이 되어가는 과정이 정교한 퍼핏을 통해 구현될 때, 관객은 스크린 속 시지가 아니라 눈앞에서 몸으로 연기되는 폭력과 마주한다. 파이가 이 모든 상황을 통과하며 보여주는 공포·분노·체념의 감정선도, 영화보다 한층 건조하고 냉정한 온도다. 이때 퍼핏은 잔혹함을 완화시키는 완충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해 몰입도를 올리는 매개가 된다. 배우들의 표정과 반응이 더해지면서, 포식과 생존의 순간들이 영화보다 훨씬 차갑고 어두운 색조로 다가온다.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이 공연의 심장은 단연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 미세하게 떨리는 귀, 허공을 가르며 휘어지는 꼬리까지, 객석에서 바라보면 처음 몇분 동안은 ‘어떻게 이렇게 정교한 인형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부터 든다. 3명의 인형술사 가운데 머리를 조종하는 배우는 턱과 눈빛으로 호랑이의 기분을 표현하고, 몸통을 맡은 배우는 호흡과 체중으로 맹수의 무게감을 만든다. 꼬리를 움직이는 배우는 한박자 늦은 떨림과 방향 전환으로 긴장과 이완을 조절한다. 세 사람이 한몸처럼 호흡하며 만들어낸 리처드 파커는, 어느 순간부터 더는 ‘특수효과’가 아니라 파이와 대등하게 무대를 나누는 또 한명의 배우가 된다.



흥미로운 건 인형술사들이 무대 위에서 숨지 않고, 오히려 대놓고 드러난다는 점이다. 동물 곁을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존재는 초반에는 분명히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파도가 치고, 배가 뒤집히고, 파이와 호랑이가 생존을 두고 대치하는 장면들이 이어질수록 관객의 시야에서 인형술사는 서서히 사라진다. 손과 어깨와 허리가 연기하는 선들이 호랑이의 몸짓으로 통합되는 순간, 관객은 인간 배우와 인형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한다. 호랑이뿐 아니라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 거북 등 각종 동물 퍼핏들도 같은 방식으로 숨을 쉰다. 영화에서 시지로 만들어낸 동물이 ‘볼거리’였다면, 무대 위 동물들은 여러 사람의 육체와 호흡이 모여 탄생한, 훨씬 인간적인 존재다. 그 과정 자체가 이 공연이 지닌 가장 독특한 감동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그러나 이 감동은 결코 따뜻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무대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동물’에게 향한다. 동물과 함께한 기묘한 표류기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잔혹한 생존기의 두 이야기를 병치해놓고, 어느 쪽을 믿을지는 관객의 선택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그 선택의 한가운데 “동물원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인간”이라는 문장이 놓여있다. 맹수보다 더 잔인할 수 있는 인간의 폭력과 잔혹함, 그럼에도 인간을 버티게 하는 믿음의 힘이 동시에 드러난다. 넓게 펼쳐진 바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같은 시각적 이미지가 공연 직후 기억을 사로잡다가도,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실존적 고민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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