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충남 예산군 수덕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근세 선불교 중흥을 이끈 ‘괴짜스님’ 경허선사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이 2년 전 이맘때 사찰기행 5번째 글을 쓰기 위해 수덕사 말사인 충남 서산 간월암에 갔을 때였다.
독립운동가 ‘만공스님’이 간월암을 새로 짓고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끝난 3일 후 광복을 맞이했다는데, 그 만공스님의 은사스님이 ‘경허선사’였다.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충남 예산군 수덕사 전경 |
근세 선불교 중흥을 이끈 ‘괴짜스님’ 경허선사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이 2년 전 이맘때 사찰기행 5번째 글을 쓰기 위해 수덕사 말사인 충남 서산 간월암에 갔을 때였다.
독립운동가 ‘만공스님’이 간월암을 새로 짓고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끝난 3일 후 광복을 맞이했다는데, 그 만공스님의 은사스님이 ‘경허선사’였다.
조계종 최대 문중 가운데 하나인 덕숭문중(덕숭산 수덕사 문중)도 경허선사와 만공스님으로부터 출발하게 됐다.
스스로를 인간 부처라 일컬었던 괴짜스님 경허선사와 그 제자 만공스님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됐고 그 과정에서 최인호 소설 ‘길 없는 길’이 경허선사 이야기임을 알게 됐다. 그때, 비록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100번째 마지막 사찰기행은 ‘길 없는 길’을 완독한 후 수덕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은 출간 당시엔 100만 베스트셀러였지만 지금은 절판돼 찾는 게 쉽지 않아 지인 도움과 중고서점을 돌아다녀 4권 전권을 어렵게 구했다.
경허선사 이야기지만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방대한 불교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게 쉽지 않아 오랜 시간에 걸쳐 분절해서 읽다보니 앞 내용은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며 완독했다.
불교에 대해 백치 상태로 발길 닿는 대로 사찰 100곳을 기행하고 글을 쓴다고 약속한 것이 26개월 전이었다. 짬짬이 시간 내어 직업도 아닌 글쓰기와 영상촬영을 하다 보니 부족함과 허점투성이일 수밖에 없었다.
설악산 봉정암에서 시작해 제주 서귀포까지 전국을 돌며 거의 매주 동영상과 글을 올리는 작업이 힘들기도 했지만 스스로 배우고 느꼈던 기쁨이 있었기에 목표점까지 올 수 있었다.
그동안 수덕사도 몇 차례 방문하긴 했다. 약속한 100번째 글을 위해 차분히 다시 찾았는데, ‘길 없는 길’에서 언급한 천장사와 정혜사, 금선대, 만공탑을 둘러보고, 보고 싶었던 ‘공민왕 거문고’도 볼 수 있었다.
충남 예산의 덕숭산(495m)은 기암괴석이 풍부하고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 바위들이 절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어 호서의 금강산이라고 한다.
수덕사 안내도 |
천오백년 고찰 수덕사를 품고 있어 덕숭산을 수덕산이라고도 하며, 수덕사 문중은 덕숭문중이라고 한다. 수덕사는 잘 정돈된 사하촌(寺下村 )과 숲과 나무들이 우거진 경내, 그리고 정혜사, 견성암, 환희대 등 산내암자들이 잘 배치돼 전통사찰의 전형을 볼 수있는 곳이다.
‘수덕사의 여승’과 덕숭총림 수덕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에 백제 천년고찰 수덕사가 ‘비구니 사찰’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1910년대에 일본 유학,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시대상에 맞서는 자유연애, 만공스님을 만난 후의 출가와 수행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여걸 김일엽(金一葉, 1896~1971년) 스님이 ‘수덕사의 여승’ 주인공으로 우리나라 최초 비구니 선원인 수덕사 견성암과 환희대(歡喜臺)에서 기거하다가 입적했다.
수덕사 환희대 원통보전 |
수덕사에 전하는 두 가지 창건설화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칭한 수덕낭자 또는 덕숭낭자가 있고, 덕숭도령, 정혜도령 등도 있어 덕숭산과 수덕사, 정혜사 등의 이름이 유래됐다.
그러나 수덕사는 오래된 역사에 비해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백제시대 550~600년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세기 중후반에 나옹 혜근선사가 절을 중수했고 한말에 경허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으며, 독립운동가 만공선사가 중창한 뒤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면서 선종의 근본도량이 됐다.
수덕사 대웅전과 양 옆의 백련당(왼쪽)과 청련당(오른쪽)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으로 마곡사의 말사였다가 광복 이후 제7교구 본사로 승격하고, 1984년 총림으로 승격해 덕숭총림(德崇叢林)이 됐다. 경허·만공의 법맥을 이은 ‘덕숭총림’과 용성·동산으로 이어지는 ‘범어문중’(부산 범어사)을 우리나라 양대 불교 법맥으로 들기도 한다.
수덕사 대웅전 |
수덕사는 1308년(고려 충렬왕)에 지어진 국보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스님들이 수도하는 승방인 백련당과 청련당이 있다.
대웅전은 단청이 거의 다 없어진 담백한 모습인데 백제계 건축양식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수덕사 대웅전 |
건립 당시에는 외부에 여러 벽화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 등 목조 삼불좌상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 목조 삼불좌상 |
보물로 지정된 삼불 좌상은 만공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는 삼층석탑이 다소곳하게 서 있다.
범고각 |
범종각에는 무게 6500근의 큰 종이 봉안돼 있다.
청련당의 ‘세계일화(世界一花)’ 편액 |
청련당 옆면에는 만공 스님이 간월암에서 천일기도 후 조국이 광복되자 길 가의 무궁화 꽃잎으로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좌측 관음바위 |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수덕낭자가 바위 속으로 사라졌다는 창건설화를 간직한 ‘관음바위’가 있다.
백색관음상 |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찾고 있어 근래에 중생의 고뇌를 씻어준다는 ‘백색관음상’을 바위 앞에 세웠다.
‘덕숭산수덕사’라고 쓴 현판이 걸린 일주문은 도톰한 돌기둥 2개에 기와지붕을 얹었는데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조각돼 있다.
근역성보관 |
일주문 주위에는 ‘근역성보관’, ‘미술관’, ‘수덕여관’, ‘환희대’ 등이 있어 방문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근역성보관에 보관 중인 만공선사(왼쪽), 경허선사 영정 |
‘길 없는 길’ 소설의 출발점이기에 꼭 보고 싶었던 ‘공민왕 거문고’는 ‘근역성보관’에 경허, 만공스님 영정과 함께 보관돼 있다.
만공스님이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에게 받은 것이라고 한다.
공민왕 거문고 |
소설에서는 ‘금선대’에 보관돼 있다고 했지만 ‘근역성보관’을 짓고 옮긴 듯 하다.
거문고에는 ‘공민왕금(恭愍王琴)’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어 한참을 들여다보게 한다.
수덕여관 |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은 초가집 여관 ‘수덕여관’은 원래 비구니 스님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한국의 신 여성이자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나혜석,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일엽스님, 그리고 나혜석에게 그림을 배우며 작품 활동을 했던 이응노 화백이 머물렀던 곳이다.
수덕여관의 손님들 |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로 가서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며 여관과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수덕사는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한 근현대 최고의 고승 경허와 만공스님뿐만 아니라 보월, 용음, 고봉, 서경, 혜암, 전강, 금오, 춘성 등과 비구니 법희, 만성, 일엽 등 걸출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됐다.
천장사와 정혜사
만공탑 가는길 |
수덕사에 가게 되면 정혜사와 천장사는 꼭 가보고 싶었다.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웠는데 지금은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는 정혜사와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는 견성암 등은 수덕사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정혜사(능인선원) |
천장사는 최인호의 소설에서 경허선사와 수월, 혜월, 월면(만공) 등 세 제자의 자취가 서린 곳으로 덕숭산 인근 연암산에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 사면석불 |
수덕사 대웅전 왼편 계곡길 따라 등산로가 시작되는데 여기서 1080개 돌계단을 오르면 정혜사를 갈 수 있다.
수덕사 사면석불 |
올라가는 길엔 암자와 석불들이 있는데 초입에 백제 시대 유일의 사면석불을 재현해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을 네 개면에 조각한 사면석불이 있다.
만공탑 권역 안내판 |
돌계단을 좀 더 오르면 소림초당과 수덕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석불 관음보살입상, 그리고 암자 향운각이 나오는데 모두가 만공스님의 흔적들이다.
덕숭산 향운각 |
덕숭산 관음보살입상 |
만공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만공탑이 석불 바로 위에 있고, 그 좌측에는 정혜사가 있으며 만공탑에서 10여분가량 산길을 더 오르면 덕숭산 정상이다.
‘만공탑’은 국가등록문화재로 둥근 돌이 올려져있는 특이한 부도탑인데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만공의 유언에 의해 사리가 봉안돼 있지 않다고 한다.
정혜사 초입의 금선대(金仙臺)는 경허, 만공 등의 유물들이 모두 ‘근역성보관’으로 옮겨진 듯 문이 굳게 닫혀있다.
정혜사는 만공 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일으킨 곳으로 지금도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원이라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금선대에서 발길을 돌렸다.
견성암 |
수덕사 바로 옆의 견성암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으로 지금은 커다란 현대식 건물들로 채워진 넓은 공간이지만 적막감마저 돈다.
천장사 |
제비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라는 연암산(鷰巖山, 440m)에 하늘이 숨겨놓은 절 천장사(天藏寺)가 있다. 경허는 천장사를 “낮은 산 연암산에 묻혀있지만 관광객이나 선비들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처도 조사(祖師)도 만날 수 없는 깊고 외딴 산중”이라고 했다.
경허탑 |
경허는 33세 때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참된 자기를 발견한 깨달음 뒤에 참된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보임(保護任持)생활을 위해 형 태허선사와 어머니가 있는 천장사로 왔다.
이곳에서 20여 년 동안 생활하면서 호서지방에 일대의 선풍을 일으킨 것이다.
천장사 |
천장사는 충남 서산에서 홍성으로 가는 길, 수덕사에선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다. 송림 사이로 뻗어있는 외길도로를 한참을 달리면 조그만 공터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200여m 가파른 산비탈 언덕길을 오르면 보인다.
천장사 입구 경허선사의 시구가 적힌 표지판 |
입구에 경허선사의 시구가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길 없는 길의 무대’라는 표지석 |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길 없는 길의 무대’라는 표지석, 수월선사 기념비 등도 서 있다.
수월선사 기념비 |
현대식 건물들도 있지만 무료함이 느껴질 만큼 한가로움이 물씬 풍겨나는 사찰이다.
천장사의 한 법당 |
경허선사가 머물렀을 법한 예스러운 법당은 이중으로 만들어진 문이 있는 독립된 한옥 같은 곳인데 인기척이 없어 닫힌 문을 결국 열어보지 못하고 ‘염궁선원’과 ‘천장사’ 현판이 붙은 외관만 보았다.
경허선사가 16개월 동안 등신불이 된 ‘염궁문(念弓門)’ 현판도 아마 이중문 안에 걸려 있으리라.
천장사 칠층석탑 |
천장사는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나 법당 앞에 고려시대 석탑양식이라는 칠층석탑으로 유추할 때, 고려 시대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근현대 경허선사와 그의 제자들이 머물렀고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고 해 알려지게 된 사찰이다.
길 없는 길 – 경허선사와 만공스님
수덕사 전경 |
선지종찰(禪支宗刹)의 덕숭총림 수덕사는 경허, 만공 스님이 그 뿌리이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경허의 법맥을 이어받고 있다고 한다. 경허 성우선사(1849~1912년)는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방만한’ 괴짜스님 생활을 했지만 조선 말 침체된 불교계에 불법의 전통계보를 이어 선불교를 진작시킨 혁명가이며 실천가로 위대한 선승이었다.
최인호의 명작소설 ‘길 없는 길’은 근현대 불교 선(禪)맥의 큰 봉우리이며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의 일대기와 세 수법제자 수월, 혜월, 만공선사의 활동을 통해 불교 법맥이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속의 경허선사의 삶은 ‘무엇에도 막힘없는 무애(無碍) 행위’라 하는데 범부(凡夫)들의 눈으로는 계율을 깨뜨리는 만행(萬行)이고 괴짜 행동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경허의 어록을 모아 ‘경허집’을 출간했던 만공스님도 “만약 학인(學人)들이 경허의 마음을 따른다면 옳거니와 경허의 행동을 따른다면 이는 옳지 않다”라고 했을까.
경허선사는 9세에 출가해 사서삼경과 기초적인 불교교리를 익히고 이후 동학사의 만화(萬化) 강백(講伯)에게 불교경론을 배우고 유서(儒書)와 노장(老莊)사상을 고루 섭렵해 23세에 동학사 강백으로 추대돼 후학을 양성했다. 어느 날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오로지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驪事馬事)”는 화두(話頭)로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1879년 34세 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수덕사 선미술관 |
얻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는 극기의 보임(保任) 생활을 위해 1880년 연암산 천장사로 들어가 15개월 동안 절대로 눕지 않는 등신불 생활을 했다. 스스로 법왕이 돼 끊긴 선맥(禪脈)을 잇고 만공, 혜월, 수월, 한암 등 수법제자들을 통해 이어 나갔다.
만공월면(萬空月面, 1871~1946년)은 14세 때 동학사로 출가, 자신의 사상과 생애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경허선사를 만나 천장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만공’이란 법호를 받아 경허스님의 법을 잇게 됐다. 1905년 이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대부분의 생애를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 및 안면도 간월암 등을 크게 중창했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과, 선승들의 결사(結社)이며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모임인 ‘선우공제회 운동’에 참여해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맥을 이어가고자 했다.
만공스님은 1937년 잠시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 주재하에 31본산 주지들이 모여 불교진흥책을 논의할 때 연단에 올라가 “데라우치(전 총독)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뒤 정교분리론을 주장한 일화를 남겼다.
1946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입적했는데 제자들이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은 경허 선사와 함께 금선대에 봉안했다.
만공탑 |
금선대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으나 만공탑에는 얼마 전 ‘만공 다례제’를 지냈는지 한 아름의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신라시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춤추고 노래하고 광대 짓하며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무애가’를 부른 기행을 일삼았던 원효대사가 있다. 당대 최고의 선승이라 불렸으나 말년엔 절에서 나와 노래 부르는 떠돌이 가객이 돼 기이한 행동을 일삼고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 무애인으로 살다간 경허선사가 있다. 원효와 묘하게 닮아 있는 경허가 외친다.
“가희 우습구나 소(부처)를 찾는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화엄경’에는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고 했다. 경허스님은 천장사 제비바위에 앉아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세속과 청산 어느 것 좋은가. 봄 햇살 닿은 곳마다 꽃 피지 않는 곳이 없네. 누가 만일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가(劫外歌, 시공과 이론을 초월한 절묘한 방법)라”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