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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충실의무와 고려아연 유상증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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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충실의무와 고려아연 유상증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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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만 투자자의 염원을 모아 이사의 주주충실의무를 명문화한 상법이 개정됐다. 그간 수많은 이해충돌 거래 속에서 일반 주주의 희생이 반복돼 왔다. 뒤늦은 개정의 배경에는 중국의 부상과 인공지능(AI) 전환 속에서 막대한 자본 유치 경쟁에 직면한 시대적 현실이 있다.

미국·중국·일본·대만 등 경쟁국은 공정한 자본시장 규칙을 만들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반면 공정한 시장을 찾아 지금도 많은 자금이 한국을 떠난다. 불공정한 자본시장을 방치한 채로는 자본을 모을 수 없다. 부지런한 인재와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처음부터 경쟁이 힘들다.

이사의 주주충실의무 입법만으로 주주 보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충돌 상황에서 이사는 완전한 공정성 원칙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다. 이 원칙이 작동했다면 과거 모 항공사를 둘러싼 유상증자 논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회사가 직접 유상증자를 받으면 되는 상황에서 모회사가 나선 것을 둘러싸고 많은 비난이 쏟아지며, 유사한 상황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고려아연의 최근 유상증자도 구조가 비슷하다. 고려아연은 유상증자와 함께 미국에 약 11조 원 규모의 제련소 건설을 발표했다. 고려아연이 미국 법인에 출자하고 연대보증까지 제공해 제련소 건설비용을 부담한다. 미국 정부는 별도 법인에 출자하고, 그 자금으로 고려아연 신주 10.3%를 취득한다. 신주를 받는 미국 정부는 실질적 부담이 없다. 출자와 연대보증, 대체 불가능한 제련 기술과 사업 기회의 국외 이전 등의 부담은 모두 고려아연 몫이다. 그 대가로 최윤범 회장이 지배권 경쟁 상황에서 우군을 얻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고려아연이 내주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희토류 정제 기술의 유출 가능성, 울산 지역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 주주충실의무 훼손으로 인한 자본시장 신뢰 저하 등 사회적 비용도 뒤따른다.

법과 정관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허용하더라도, 이사의 주주충실의무가 입법된 이상 그 허용은 충실의무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이해충돌 거래로 의심되는 상황에서는 완전한 공정성 원칙이 적용되며, 엄격한 절차 없이는 위법 논란을 피할 수 없다.

미국 제련소의 경제성 여부와 무관하게, 거버넌스를 훼손한 결정은 장기적으로 국가와 자본시장에 손해다. 투자자들의 자금이 더 나은 거버넌스를 찾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혜섭 변호사·남양유업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