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대학 학생들이 쓰고 그린 책 ‘반장은 왕이 아니야!’ 중에서. |
김현정 | 방송작가·‘연중마감, 오늘도 씁니다’ 저자
‘대구는 무서운 곳이니 조심해라.’ 한 지인에게서 농담 섞인 문자가 날아왔다. 혹시 모르니 그곳에선 말조심하라는 당부다. 대구의 한 대학에 특강을 가게 되었노라고 주변에 알린 직후였다. 장난인 줄 알면서도 슬며시 뒤통수가 당겼다.
그만큼 낯선 지역이긴 했다. 역사학과를 나와 전국 팔도를 답사했지만 공교롭게도 대구는 이 나이 먹도록 가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곳은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의 심장, 뚜렷한 정치색과 견고한 지역감정의 상징으로 호명되는 카랑카랑한 도시가 아닌가. 지난 몇십년간 학습된 선입관을 핑계로 나는 조금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호기심을 품고 내린 동대구역. 오히려 전직 시장과 더 닮아 보이는 박정희 동상을 지나, 폭이 좁은 지하철에 앉아 낯선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은행잎이 찬란히 떨어지던 대학 캠퍼스, 강당을 채운 학생 수를 어림해보니 남학생이 제법 된다. 조금씩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요즘 학생들이 꽤나 예민하다는 기사 내용을 수차례 접해온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헛기침하며 긴장했던 순간도 잠시, 마음은 어이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내가 보아온 또래 청년과 다르지 않았다. 수업 대신 듣게 된 특강 덕에 다들 조금은 신이 났고, 강연마다 으레 그러하듯 맨 앞에 앉은 한명이 연신 엉뚱한 질문을 해댔다. 그 사이를 틈타 누군가는 딴짓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또래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책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이어졌다. “선배, 대구 가본 적 없죠? 다녀온 뒤에 다시 얘기해요.” 전화기 너머 억울해하던 이 지역 출신 후배의 항변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구대 학생들이 쓰고 그린 책 ‘반장은 왕이 아니야!’ 표지. |
왠지 모를 미안함은 건물 복도에 전시된 학생들의 전시작품을 본 순간 정점을 찍는다. “우리 학생들이 직접 만든 그림책인데요, 꼭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담당 교수님의 자랑을 들으며 펼쳐 든 책의 제목은 ‘반장은 왕이 아니야!’(글 박가연·박보민·양지윤·이유림·최승아, 그림 최승아) 작품에는 민주초등학교에서 선거를 통해 반장이 된 석두가 등장한다. 제목과 이름에서 짐작하듯 석두는 조금씩 나쁜 쪽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결국 참다못한 친구들이 투표를 통해 새로운 반장을 뽑는다는 내용이다. ‘반장 석두를 파면한다.’ 절차에 따라 투표한 학생들의 결과지를 받아든 선생님의 최종 결정은 굵고 선명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연대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누구나 헌법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그림책 맨 마지막에 실린 학생들의 후기와 다르지 않았다. 기성세대는 지역감정이라는 낡은 편견 안에서 여전히 갈라져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의 청년들은 세상의 상식과 기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편견과 혐오는 악인만 품고 있는 유별난 감정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었던 까닭없는 선입관이 바로 편견이고 혐오였다. 만나지 않아서 그렇다.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더구나 세대가 달라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의 미련함이기도 하다.
문득 작년 이맘때 유독 억울해하던 아들의 표정이 생각났다. 12·3 불법계엄 이후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가 물결쳤을 때의 일이다. 거리에 나선 젊은 세대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뉴스를 접하고는 부부가 나란히 혀를 차며 요즘 청년들을 험담했다. 몇주 동안 국회 앞에 나가 응원봉을 흔들었던 아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부모를 바라보았다. “엄마, 20대라고 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복잡한 마음을 품고 먼 길을 다녀온 밤. 가족과 맥주 한잔을 앞에 두고 나의 첫 대구 답사기를 간증하듯 풀어놓았다. 대구는 내가 상상해온 그런 도시가 아니더라. 우리 세대가 쌓아놓은 편견과는 너무나 다르더라. 그리고 요즘 학생들 정말 근사하더라…. 한참을 듣고 있던 아드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한마디 쥐어박는다. “어휴, 그러니까 반성 좀 하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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