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중앙일보 언론사 이미지

'죽음의 울타리' 걷어낸 설악산…눈밭서 나타난 멸종위기종 정체 [영상]

중앙일보 천권필
원문보기

'죽음의 울타리' 걷어낸 설악산…눈밭서 나타난 멸종위기종 정체 [영상]

속보
뉴욕증시, 美 고용 부진에 약세 출발…S&P500 0.2%↓
14일 겨울 폭설이 내린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 한계령. 도로 양옆으로 설치된 철제 울타리가 기둥만 꽂힌 채로 뻥 뚫려 있다. 지난달 철거를 시작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용 울타리다.

14일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 도로 주변에서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 새끼 산양의 모습. 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14일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 도로 주변에서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 새끼 산양의 모습. 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울타리를 따라 이동하던 중 표지판 옆에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됐다. 눈 덮인 풀숲에서 아직 뿔도 나지 않은 새끼 산양 한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털은 눈에 젖어 있었고, 먹이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남사면(산에서 남쪽을 향해 있는 경사면)으로 내려오면 눈이 녹아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눈에 잘 띄어요. 그래서 자기가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 상상을 못 하고 도로가에 붙어서 먹이 활동을 하는 거죠. "

목소리를 낮춘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정 사무국장이 조심스레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산양은 눈을 헤치면서 다시 산을 올랐다. 그는 “2년 전 겨울에 일어난 산양 떼죽음 이후 살아남은 개체가 낳은 새끼로 보이는데 긍정적 신호”라며 “(안전을 위해) 산 안쪽으로 유인해서 올려보냈다”고 했다.

14일 강원에 쏟아진 폭설로 인해 하얗게 변한 설악산국립공원. 설악산 일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ASF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14일 강원에 쏟아진 폭설로 인해 하얗게 변한 설악산국립공원. 설악산 일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ASF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산양 떼죽음 당한 설악산…3.9㎞ 울타리 우선 철거



14일 설악산국립공원 일대에 설치된 ASF 차단 울타리 일부가 철거된 모습. 천권필 기자

14일 설악산국립공원 일대에 설치된 ASF 차단 울타리 일부가 철거된 모습. 천권필 기자


설악산국립공원은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1급인 산양의 핵심 서식지다. 산양의 생존을 위협했던 철제 울타리가 설악산부터 철거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정부는 겨울철을 앞두고 지난달 설악산 미시령과 한계령 일대 3.9㎞ 구간의 ASF 차단 광역울타리를 우선 철거했다.


2024년 2월 설악산 국립공원 도로가에서 발견된 천연기념물 산양. 정은혜 기자

2024년 2월 설악산 국립공원 도로가에서 발견된 천연기념물 산양. 정은혜 기자


겨울철 첫눈이 내리면 산양에겐 생존을 위한 시련의 시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2019년부터 설치된 ASF 차단 울타리는 폭설을 피해 산 밑으로 내려온 산양에게 ‘죽음의 울타리’가 됐다. 전국에 설치된 총 1630㎞의 광역울타리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지만, 장기간 유지되면서 생태계 단절을 유발했다.

14일 설악산국립공원 일대에 설치된 ASF 차단 울타리 일부가 철거된 모습. 천권필 기자

14일 설악산국립공원 일대에 설치된 ASF 차단 울타리 일부가 철거된 모습. 천권필 기자


2023~2024년 겨울철에는 강원 지역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면서 1000마리 이상의 산양이 생명을 잃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2023년 11월부터 2024년 5월까지 총 1022마리의 산양이 폐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폭설로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진 산양이 울타리에 가로막혀 이동이 제한되면서 떼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설악산 일대의 산양 개체 수는 눈에 띄게 급감했다.

정 국장은 “산양은 다리가 짧고 배에 털이 없기 때문에 눈에 닿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체온이 떨어진다”며 “울타리 안쪽으로 눈이 깊게 덮여 있어서 한번 빠지면 허우적거리면서 저체온증이 올 수 있어 위험하다”고 했다.




열린 울타리로 산양 겨울철 집단 이동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울타리가 일부 열리자 산양 생태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국립생태원이 지난해 5월부터 1년 동안 모니터링한 결과, 부분 개방한 울타리 44곳에서 산양의 집단 이동이 관찰됐다. 특히, 겨울철인 1월과 2월에는 산양이 개방 구간을 통과한 것만 각각 900건에 달했다.

2024년 3월 3일 강원도 설악산 지역 도로가에서 발견된 산양.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펜스 앞에서 멈춰섰다. 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2024년 3월 3일 강원도 설악산 지역 도로가에서 발견된 산양.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펜스 앞에서 멈춰섰다. 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윤광배 국립생태원 선임연구원은 “겨울철이 되면 산양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습성이 있어서 활동성이 극대화 된다”며 “완전 철거가 이뤄질 경우 이동 경로가 회복되고, 개체 생존율도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내년 136㎞ 울타리 철거…“방역 체계 ‘선택과 집중’ 전환”




정부는 내년부터 3단계에 거쳐 울타리를 단계적으로 철거하기로 했다. 우선 설악산·소백산 국립공원 등에 설치된 136.6㎞ 길이의 울타리를 내년부터 1단계로 철거한다. 생태적 가치가 높으면서도 산양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다.

본격적인 철거 작업은 내년 봄 이후에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올겨울이 산양에겐 생존의 마지막 고비가 될 수 있다. 정 국장은 “폭설에 대비해 산양 구조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ASF 대응 역시 울타리 중심에서 벗어나 생태계 보전과 효율적 방역을 동시에 고려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영철 강원대 산림과학대 교수는 “국내에서 ASF가 토착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방역도 포괄적 체계에서 벗어나 농가가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설악산국립공원=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