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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의 공포도 꿈을 가로막진 못했다…끝없이 되뇐 “괜찮아질 거야” [암을 이겨낸 청년들①]

쿠키뉴스 신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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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의 공포도 꿈을 가로막진 못했다…끝없이 되뇐 “괜찮아질 거야” [암을 이겨낸 청년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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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의 발전은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암 치료 환경을 바꿔놨다. 전체 암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은 70%를 넘었고, 수많은 이들이 병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청년기에 암을 겪은 이들은 학업, 취업, 인간관계 등 삶의 중요한 국면에서 오랜 기간 깊은 단절을 경험한다. 사회적 시선과 제도의 공백 속에서 혼자 버텨야 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치료를 넘어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여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7편에 걸쳐 함께 고민해 본다. [편집자주]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윤기만 디자이너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윤기만 디자이너



2022년 3월, 신소라(32)씨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후 왼쪽 겨드랑이에서 혹이 잡혔다. 혹은 점점 커졌지만, 동네 병원에선 “백신 부작용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혹이 커질수록 불안감도 커졌다. 종합병원 외과를 다시 찾아 조직검사 등 정밀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BRCA 유전자 변이 삼중음성 유방암이었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병에 대한 원망이 가슴을 채웠다

암을 진단받고 신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엄마였다. 6년 전(2016년) 유방암 2기 진단 후 항암과 수술 등 치료를 마쳤지만, 얼마 안 돼 암이 재발하며 끝내 돌아가셨다. 엄마의 투병 생활을 다 지켜봤기에 치료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았다. 엄마처럼 똑같이 되진 않을지 덜컥 겁이 났다. 암보험도 없었기 때문에 치료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막막했다.

“모아둔 돈은 거의 없었고, 가족들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유방암은 다 똑같은 유방암인 줄 알았는데 저는 그중에서도 예후가 가장 좋지 않은 삼중음성 유방암이었어요. 지금은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받을 수 있는 표적치료제가 있지만, 그때 당시엔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오래전 개발된 세포독성 항암제로 치료받았어요.”

삼중음성 유방암은 종양의 아형 가운데 에스트로겐수용체(ER), 프로게스테론수용체(PR), 표피성장인자수용체2(HER2)가 모두 없는 유방암을 말한다. 다른 유방암에 비해 쓸 수 있는 항암제가 제한적인 데다가 전이나 재발 확률도 높다. 절반 이상의 환자는 진단 후 3~5년 안에 재발을 경험하며, 뇌나 폐로 원격 전이되는 비율이 약 70%에 이를 정도로 예후가 좋지 않다.

삼중음성 유방암은 기존 표준치료에 거의 반응이 없어 치료법도 제한적이다. 지난 6월 글로벌 제약사 길리어드 사이언스의 TROP2 표적 항체약물접합체(ADC) ‘트로델비’(성분명 사시투주맙 고비테칸)가 국소진행성 또는 전이성 삼중음성 유방암의 3차 이상 치료에 대해 급여를 적용받긴 했으나 당시 신씨는 혜택받을 수 없었다.

2022년 5월 신소라씨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신소라씨 제공

2022년 5월 신소라씨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신소라씨 제공



암을 진단받고 근무하던 미용실을 그만뒀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머리를 만져주는 게 좋아 시작한 일이었다. 미용사 자격증 준비도 한동안 내려놓게 됐다. 독한 항암 치료에 몸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머리카락은 숭덩숭덩 빠졌다.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마다 구토했다. 병에 대한 걱정과 원망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신씨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이다. 50~60대에 올 암이 일찍 온 거다”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치료에만 최선을 다하고 좋은 생각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걱정과 두려움이 암세포에 좋은 먹이가 될 수 있다”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괜찮아질 거야, 나을 거야” 수십 번 되뇌었다.

긍정은 기적으로…재발의 공포는 남았다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은 탓일까. 대체로 치료제가 잘 들었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받았다. 주치의는 ‘기적’이라고 했다.

“방사선 치료가 많이 힘들었어요. 속이 안 좋아서 잘 먹지도 못했고, 면역력을 유지하기 위해 밖에 나가질 못했어요. 거의 집에서만 활동하다 보니 우울증을 겪기도 했고요. 하지만 주변에 도움을 구할 곳이 많지 않았어요. 고맙게도 남자 친구가 병시중을 다 들어줬죠.”

2022년 5월 신소라씨가 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신소라씨 제공

2022년 5월 신소라씨가 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신소라씨 제공



유방암이 일반적으로 고연령층에서 주로 발병하는 것과 달리 삼중음성 유방암은 비교적 젊은 여성에서 발생 확률이 높은 편이다. 특히 BRCA 유전자에 변이가 있을 때 유방암 발병 위험이 커진다. 일반 여성의 유방암 발생 확률은 10% 미만이지만, BRCA 변이면 평균 40~80%까지 유방암 위험이 커질 수 있다. 난소암 발생 확률도 44%까지 높아져 치명적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 암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신씨가 선택할 방법은 암이 재발할 위험이 큰 기관들은 다 제거하는 것이었다. 암이 발병한 왼쪽 유방을 비롯해 오른쪽 유방, 임파선(림프절) 그리고 난소까지 절제했다.

2024년 초 치료를 모두 마쳐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았지만, 후에 남은 것은 여성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주기적으로 검사받으러 병원에 가는 날만 다가오면 암이 재발하거나 결과가 안 좋게 나오진 않을지 걱정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투병 중에도 놓지 않은 꿈

재발에 대한 공포가 컸지만, 그의 꿈은 가로막을 수 없었다. 신씨는 항암 치료를 하면서도 목표를 갖고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싶었다. 다시 미용사 자격증 준비에 나섰고, 7번의 도전 끝에 취득할 수 있었다.

미용사 자격증을 따니 이용사 자격증에도 욕심이 생겼다. 한국BMS제약과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리부트(Reboot)’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주 5일 하루 8시간 이상 자격증 공부를 했다. 무리를 하면 팔이 붓고 아팠지만, 조금씩 운동하며 체력을 길렀다. 열정과 노력은 보상으로 돌아왔다. 최고 득점으로 이용사 자격증을 거머쥘 수 있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윤기만 디자이너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윤기만 디자이너



“항암을 하며 시험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빠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두건을 쓰고 시험공부를 했어요. 남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힘들었는데 좋아하는 일이니까 재미있었어요. 아침에 집을 나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들어오길 반복했어요.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나니 이용사 시험에도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두 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은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서울역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미용 봉사를 다니고 있다. 구직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신씨에겐 꿈이 있다. 자신만의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손님들의 머리를 자르고, 지금처럼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저와 같이 암을 이겨낸, 이겨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꿈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그 꿈을 위해 계속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잘 지내고 치료도 잘 받으라고.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고요.”

신대현 서명

신대현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