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는 1990년 미술관 안으로 죽은 소의 사체와 곤충을 끌어들인 작품 ‘천년’(A Thousand Years)으로 현대 미술계의 충격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유리로 된 큰 진열장에 송아지 머리, 구더기, 파리 그리고 파리를 죽일 수 있는 전기 트랩을 설치하고, 파리가 부화·증식·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전시했다. 관람객은 진열장 밖에서 구더기가 파리가 되고, 송아지 사체를 뜯어 먹으려다 감전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죽음을 박제한 예술가’라는 명성답게 그는 이후에도 포름알데히드가 담긴 투명 탱크에 소, 말, 돼지, 얼룩말, 상어 등을 가둬 전시했다. 작가는 “통제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의 축소판”을 표현하려 했다지만, 자연스레 ‘예술적 표현이 동물의 생명보다 중요한가’라는 논란이 뒤따랐다. 2012년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는 살아 있는 나비가 등장했는데, 전시장을 날던 나비 상당수는 그곳에서 죽었다.
허스트뿐이겠는가. 이후에도 작가들은 예술을 위해 굶주린 유기견을 전시장에 묶어두거나(기예르모 바르가스, ‘전시 1번’), 해파리 디엔에이(DNA)를 토끼에 합성해 ‘형광 토끼’를 만들어냈다(에두아르도 카츠, ‘GFP’). 안타깝게도 미술 안의 ‘동물 착취’는 드러나는 곳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작업 재료, 주제 선택, 표현 방식 등 창작의 전 과정에서 동물의 몸은 재료로 쓰였고, 동물 도살·포획·실험이 볼거리로 전락하는 예술적 관행이 스며 있었다.
공공예술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2020~2021년)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디자이너, 미술작가, 활동가, 시민이 모여 동물권·생태·젠더·지역성·기술윤리를 주제로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 핵심 작업 중 하나가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 ver.1’이었다. 김화용 작가를 비롯해 5명이 참여해 만든 이 매뉴얼은 전시 준비·설치·운영 전 과정에서 당연하게 여겨져온 동물 착취, 환경 파괴적 관행을 곱씹었다. 예컨대 완충재, 석고보드는 어떻게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대안적 재료는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식이다.
왜 ‘친환경 전시 매뉴얼’이나 ‘지속 가능한 전시 매뉴얼’이라 하지 않았나. “실제로 기후 정의나 환경 파괴를 논하면서도 비인간 생명과 관련된 논의는 누락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공개 당시 누구든 수정 가능한 ‘열린 매뉴얼’로 공개됐던 이 프로젝트가 오는 20일 서울예술인지원센터에서 열리는 ‘제로의 창작’ 포럼에서 4년 만에 ‘공식 업데이트’된다. 우리 사회에는 ‘피 묻은 빵’만이 아니라 ‘피 묻은 종이’도 있다는 이들의 주장이, 이번엔 어떤 울림으로 퍼져나갈 수 있을까.
김지숙 지구환경부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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