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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찬교수의 광고로보는 통신역사]〈47〉실리콘밸리의 교훈, 혁신 클러스터의 성공은 기술과 문화의 결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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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찬교수의 광고로보는 통신역사]〈47〉실리콘밸리의 교훈, 혁신 클러스터의 성공은 기술과 문화의 결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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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의 '지성인들의 집단 지성' 광고(2024.06.13.)와 SK텔레콤의 '벤처 인큐베이팅' 광고.(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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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공리화(axiomatization)'는 사물의 본질을 몇몇 핵심적 구성 요소로 식별해 규명하는 작업이다. 경제학 노벨상 수상자들은 협상(내시)·선거방식(애로우)·상대 빈곤(센)의 의미를 정치화하는 데 사용했다. 굳이 어려운 수학을 쓰지 않더라도 예컨대 맥·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스티브 잡스의 성취나 세계 정보기술(IT)의 발신지로서의 실리콘밸리 성공을 규명하는데도 적용된다.

실리콘밸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한 미·소 냉전 시대 하에 미국 정부의 국방 연구개발 투자가 캘리포니아에 마중물로 유입돼 형성된 역사적 경위가 있다. 냉전기의 갈등·불안이 가속한 기술 경쟁은 인터넷·핵폭탄을 탄생시켰고 팔로알토에 소재한 스탠퍼드대는 전후 복귀한 학생들의 취업처를 모색하면서 스타트업의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바로 이 클러스터에 발을 디디면 누구나 개방적인 정보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다. 3년을 주기로 이루어지는 노동력 이동(job-hopping)은 인재·아이디어의 교차를 촉진하고 '비경쟁조항 금지법'은 혁신의 확산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진공관을 발명한 쇼클리 밑에서 트랜지스터를 연구하던 8인방이 독립해 스타트업인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하고 그 스핀오프가 인텔·AMD 같은 굴지의 반도체 회사가 세워진 배경이다. 대학·기업·정부의 기술개발 협업과 창업자·엔지니어·투자자의 신뢰 네트워크도 중요한 요소다.

성과 중심의 능력주의에 따라 소속집단·나이보다 실력·성과를 중시한다. 이민자·이단자와 같은 이질적 요소를 수용하는 다양성은 개인의 자율성·유인과 상호성에 의한 집단지능이 발휘될 수 있게 해준다. 미 서부의 히피 문화와 엔지니어 자유로운 개척 정신이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실패를 학습 일부로 받아들이는 위험 감수형 정신(Fail Fast, Learn Faster)이 만연하며 벤처캐피털의 자금이 지속하게끔 한다. 완성도보다 출시 속도를 중시한다.

고연봉·워라밸과 같은 양호한 삶의 질도 빼놓을 수 없다. 필자가 클러스터 탐방 시 만났던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이에 매료되고 양질의 자녀 교육 환경을 쫓아 도미했다. 다만 생활비·세금이 워낙 비싸고 캘리포니아 치안도 예전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코로나 때 비대면 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일부 IT 기업이 거점을 텍사스·오스틴으로 옮겨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마이클 포터는 국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조건으로 지리적 근접성과 인적 네트워크를 집적한 클러스터를 든다. 정부도 시대에 맞추어 창업 생태계 구축, 산업의 디지털 전환, 반도체·인공지능(AI)·인공지능전환(AX) 클러스터 조성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실리콘밸리 성공 사례가 말해주듯 혁신은, 정부의 마중물과 기술적 기반 위에 자율·개방·다양성·실패의 수용과 같은 사회문화적 공리가 작동해야,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개인이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상하 권력 거리가 지나치지 않고, 다름·불완전함을 인내하지 못해 규격화·규제하려고 들지 않는, 그리고 새로운 인재와 아이디어의 유입을 가로막는 동질성을 경계하는 사회 문화, 이런 문화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범세계적인 한국형 실리콘밸리도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ncl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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