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10억달러 투자 ‘통 큰 베팅’
16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핀란드 장수기업 노키아가 부활의 날갯짓을 펴는 걸까. 전 세계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엔비디아가 최근 노키아 지분을 인수해 2대 주주에 올라서자 글로벌 시장 주목을 한몸에 받는다. AI 인프라 사업 기대에 힘입어 주가도 급등해 옛 영광을 다시 되찾을 것이란 장밋빛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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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을 호령했던 노키아 실적이 다시 반등하자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사진은 핀란드 노키아 본사 전경. (AP=연합뉴스) |
노키아 주가 상승세
엔비디아, 노키아 2대 주주 올라
미국 뉴욕 증시에 주식예탁증서(ADR) 형태로 상장된 노키아는 최근 한 달간 36.2% 상승했다(10월 7일~11월 6일 기준). 10월 28일에는 7.77달러에 장을 마감하며 2015년 4월 이후 10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주가가 6달러 안팎에서 횡보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반등할 것이란 기대가 크다.
노키아 주가가 날개를 단 것은 글로벌 AI 반도체 강자 엔비디아가 10억달러(약 1조4600억원)를 전격 투자하기로 한 영향이 크다. 엔비디아는 지난 10월 주당 6.01달러에 신주 약 1억6639만주를 인수해 노키아 지분 2.9%를 확보했다. 이로써 단숨에 노키아 2대 주주로 올라섰다.
두 회사는 AI 기반 무선통신 인프라 개발을 위한 협력에 나선다. 기존 무선접속망(RAN)에 AI 기능을 접목한 ‘AI-RAN’을 공동 개발할 예정이다. 자율주행, 디지털트윈, AI 로봇 등 차세대 서비스를 위해 기지국이 실시간으로 네트워크를 최적화하는 것이 목표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AI는 생성형 AI, 로봇공학 등으로 확장되며 무선통신 네트워크를 재창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긍정적인 해석이 나온다. 미국 투자은행(IB) 제프리스는 노키아 투자의견을 기존 ‘보류’에서 ‘매수’로 바꿨다. 목표주가도 5.21달러에서 7.63달러로 높였다. 노키아의 차세대 통신망이 AI 기술 도입의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란 기대 덕분이다. 김일혁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엔비디아가 통신 기술을 갖춘 노키아와 협력하는 것은 피지컬 AI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라며 “피지컬 AI 시대에는 AI 데이터센터와의 통신량이 많아지는데, AI-RAN이 중간 허브 역할을 해 데이터 최적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키아 실적도 상승세다. 노키아는 올 3분기 매출이 48억3300만유로로 전년 동기 대비 9% 늘었다고 밝혔다. 통신 인프라 부문 매출은 같은 기간 11%, 클라우드 네트워크 서비스 부문은 13% 증가했다. 모바일 통신 부문 매출도 4% 올라 힘을 보탰다. 노키아는 “통신 인프라 사업 중 광통신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했다”며 “AI, 클라우드 확산으로 고성능 통신 인프라를 원하는 고객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라고 밝혔다. 실적, 주가가 우상향 곡선을 그리자 시장에선 ‘노키아의 완벽한 부활’이란 평가가 나온다.
목재 생산에서 휴대폰 업체로 변신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점유율 10% 추락
한때 전 세계를 주름잡던 ‘휴대폰의 제왕’ 노키아는 원래 핀란드 목재, 제지 생산 업체였다. 고무 회사, 케이블 회사를 잇따라 인수해 사업을 키웠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천연자원 가공업은 전망이 밝지 않았다. 당시 전자기기 보급이 급속도로 확대되자, 노키아는 ‘GSM(2G 이동통신 표준)’이라는 통신 네트워크 사업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천연자원 가공 업체가 전혀 다른 첨단 통신 장비, 통신 기술 개발 업체로 과감히 탈바꿈한 것이다.
노키아는 네트워크 장비뿐 아니라 휴대폰 사업까지 확장해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점차 높여왔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30% 이상 점유해 세계 1위 업체로 올라섰다. 한때 점유율 40%를 넘길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애플 아이폰이 등장하고 스마트폰 생태계가 확장하자 노키아 시장점유율은 2008년 이후 급속도로 하락했다. ‘스마트폰은 틈새상품’이라는 오판에 이 시장을 철저히 외면한 탓이다.
뒤늦게 2009년 ‘아이폰 킬러’를 표방하며 내놓은 신제품 ‘N97’은 노키아 소프트웨어 부실만 드러낸 채 싸늘한 반응을 얻었다. 애플 앱스토어에는 10만개 넘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는데, 노키아 운영체제 심비안은 고작 500개뿐이었다.
급기야 노키아는 심비안OS를 포기하고 MS와 전략적 제휴를 맺기로 했다. 이를 통해 MS와 공동 개발한 윈도우폰 ‘루미아’까지 내놓았다. 이 또한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윈도우 모바일OS는 애플 생태계에 밀리며 사용자 선택을 받지 못했다. 더 이상 앱을 만들 개발자도 끌어들이지 못했다.
잇따른 실책 속에 노키아의 글로벌 휴대폰 시장점유율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한때 40%를 넘던 시장점유율이 2014년 1분기 11% 수준으로 하락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지켜왔던 휴대폰 시장 1위 자리도 삼성전자에 내줬다. 이에 노키아 경영진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린다. 2014년 72억달러를 받고 휴대폰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MS)에 넘기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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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CEO 취임 후 분위기 반전
휴대폰 대신 5G 네트워크 사업 주력
노키아가 몰락의 길을 걷나 싶었지만 2014년 라지브 수리 CEO가 취임한 후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인도 출신인 수리 CEO는 1995년부터 노키아에서 일하며 노키아의 흥망성쇠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다. 노키아의 B2B 네트워크 장비 사업부를 총괄하는 과정에서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적자 투성이였던 사업부를 알짜 사업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비전은 명확했다. 5G 네트워크부터 키워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2015년 경쟁사인 프랑스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수 가격이 156억유로로 우리 돈 25조원을 훌쩍 넘는다. 노키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었다. 알카텔-루슨트는 무려 3만개가량 특허를 보유한 미국 벨연구소를 소유해 탄탄한 기술력을 인정받는 업체였다.
과감한 M&A 베팅으로 노키아는 글로벌 5G 시장을 점차 선도하기 시작했다. 2018년 노키아가 출시한 5G 전용 칩 ‘리프샤크’는 크기가 작고 전력소비를 줄인 데다 속도는 기존보다 빠른 제품이었다. 대대적인 기술 투자 덕분에 노키아는 글로벌 5G 단독망 시장에서 단숨에 선두 주자로 올라선다.
이수성 롤랜드버거 대표는 “노키아는 B2C 제품인 휴대폰 사업에서 철수한 후 기업 네트워크, IP 등 B2B 사업으로 과감히 재편해 안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알카텔-루슨트 인수는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해 다양한 네트워크 솔루션을 제공하는 종합 네트워크 공급 업체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물론 5G 시장이 금세 열리지 않고 연구개발비 부담이 커지는 등 주주 불만이 확산하자, 라지브 수리 CEO가 물러났지만 노키아는 주저앉지 않았다. 올 4월 취임한 저스틴 호타르 CEO는 “노키아가 AI 슈퍼사이클에 올라탔다”고 자신했다. 그는 CNBC 인터뷰에서 “AI 슈퍼사이클로 네트워크 구축 수요가 엄청나다”며 “자율주행 차량, 가상현실, 로봇공학 보급률은 아직도 낮은 만큼 데이터센터 확장으로 노키아의 광섬유 기술 수요가 더 증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생성형 AI 열풍으로 글로벌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일자, 데이터센터 내부 서버 통신에 필요한 광섬유 통신 수요가 급증했다.
노키아는 올 초 미국 광통신 장비 기업 인피네라를 인수해 글로벌 광통신 장비 분야 2위 업체로 올라섰다. 1위 중국 화웨이를 바짝 추격하는 중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 갈등으로 AI 데이터센터에 중국산 장비를 채택하기 어려운 만큼, 노키아 광통신 장비 수요가 급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에는 벨연구소에 약 35억달러를 투자해 유·무선 통신과 광통신, 데이터센터 통신 관련 AI 기술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 연구 대상에는 긴급구조를 비롯한 핵심 임무나 방위 분야 관련 기술도 포함된다.
노키아는 또 텍사스, 뉴저지, 펜실베이니아주 등의 지역에서 제조와 R&D에 5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저스틴 호타르 노키아 CEO는 이번 투자에 대해 “앞으로 수년간 통신망의 미래를 형성할 최신 연구와 혁신을 추진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며 “국가 보안과 생산성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노키아는 이번 투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협력에 따른 것이라며, 미국과 동맹국이 AI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성명에서 “노키아의 40억달러 투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을 위해 거둔 또 하나의 성과”라며 “AI, 데이터센터, 국가안보 핵심 분야를 이끄는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미국 내에서 개발되고 생산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또한 엔비디아는 노키아와 손잡고 6G 기술을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엔비디아가 특수 제작한 이동통신용 칩을 제공하고, 노키아가 5G에 이어 6G 장비도 미국에서 생산할 것이란 전망이다. 자율주행, 로봇, 드론택시 등 물리적 AI 시대가 열리려면 통신이 중요한데, 5G보다 앞선 6G 기술이 상용화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AI와 6G로의 전환으로 미국이 다시 통신 기술에서 승리하게 할 것”이라며 “이를 실현할 훌륭한 파트너 노키아를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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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재편으로 부활, 시사점은
과감한 M&A, B2B 전환 눈길
노키아의 부활은 국내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핵심 사업 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한 사업 재편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 중 대대적인 사업 재편을 통한 변신 성공 사례로 두산그룹을 빼놓을 수 없다. 두산은 박승직 창업주가 서울 종로4가에 연 포목점으로 출발해 유통 등 소비재 기업으로 변신했다. 이어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대우종합기계(현 HD현대인프라코어), 미국 건설기계 기업 밥캣(현 두산밥캣)을 인수해 중공업, 기계 중심의 ‘중후장대그룹’으로 체질을 바꿨다.
지난해에는 사업 재편을 통해 로봇·기계 등 스마트머신(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원자력발전·수소 등 클린에너지(두산에너빌리티·두산퓨얼셀), 반도체·첨단소재(두산테스나) 등 3대 축을 앞세웠다. 최근엔 반도체 웨이퍼 업체 SK실트론 인수를 추진, 웨이퍼(소재)부터 후공정(테스트)·자동화(로봇)까지 아우르는 밸류체인 완성에 힘쓰는 중이다.
덕분에 실적도 상승세다. 두산은 올 3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09.9% 증가한 2313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매출도 4조4524억원으로 14.8% 늘었다. 반도체 시장 호조에 힘입어 두산 자체 사업이 급성장했고 두산에너빌리티, 두산밥캣 등 주요 계열사들의 호실적까지 겹치며 수익성이 개선된 덕분이다.
사업 재편에 속도를 내는 또 다른 기업으로 SK에코플랜트가 손꼽힌다. 당초 SK건설에서 이름을 바꾼 SK에코플랜트는 건설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환경 사업에 승부수를 던졌다. 환경업 진출을 선언한 후 리뉴어스, 리뉴원 등 환경 전문 기업을 잇따라 인수했다.
하지만 환경 자회사 실적이 신통치 않자 리뉴어스, 리뉴원 등 환경 자회사를 글로벌 사모펀드 KKR에 매각한 뒤 또 한 번 사업 재편에 나선다. 이번엔 반도체 공정, AI 데이터센터 관련 사업이다. 지난해 반도체 모듈 회사 에센코어, 산업용 가스 제조사 SK에어플러스를 자회사로 편입했다. 이를 통해 반도체 소재 생산부터 제조시설 설계·조달·시공(EPC)까지 아우르며 반도체 종합 서비스 기업으로 전환했다.
덕분에 실적도 반등했다. SK에코플랜트는 올 3분기 연결 기준 매출 3조2483억원, 영업이익 1574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65% 증가했고, 영업적자에서 벗어났다.
이수성 롤랜드버거 대표는 “노키아 사업 재편 과정을 보면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메우기 위해 과감한 M&A에 나선 데다, 글로벌 기업들과 탄탄한 파트너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 주효했다”며 “비핵심 부서를 정리하고 고수익의 B2B 제품으로 전환하는 전략 역시 효과를 본 만큼, 우리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진단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8호 (2025.12.10~12.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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