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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칼럼]‘허위조작정보근절법’이라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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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칼럼]‘허위조작정보근절법’이라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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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표현의 자유 제약이 가장 심한 국가에 속한다. 진실한 사실을 말해도 형사·민사로 책임을 묻고,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죄·모욕죄를 중범죄로 처벌하고, 행정기관이 방송 내용을 심의해 제재하고, 인터넷을 검열하는 유일무이한 국가다.

특정 정부가 일탈 행위를 한 결과가 아니다. 교대로 집권한 양당 가운데 어느 한 정당이라도 통제를 포기했으면 이렇게 이중삼중 통제망을 구축하지 못한다. 양당 정부는 예외 없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권력자원을 동원했다.

이명박은 언론 탄압, 여론 통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탄압·통제에 기여한 노무현의 역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무현은 임기 말 독립기구인 방송위원회를 방송통신위원회로 개편해 행정부에 편입시킨 뒤 방송 심의는 물론 인터넷 통제도 맡겼다.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 인수를 준비하던 2008년 1월 노무현은 “방통위는 다음 정부가 누가 되느냐에 관계없이 정부에 속해야 한다”며 언론계·시민단체 반대를 묵살했다.

이명박·박근혜가 노무현 선물로 얼마나 열심히 방송·인터넷을 통제했는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 문재인·윤석열도 마찬가지다. 특히 문재인은 자신을 비방한 일개 청년을, 폐지하겠다던 모욕죄로 고발해 청년이 10개월간 경찰로부터 주변 행적에 관한 집중수사를 받도록 괴롭혔다. 이재명도 범정부 차원에서 가짜뉴스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어느 정부보다 더 과감하고 도전적인 통제 방안을 내놓았다.

이재명 정부는 과거 정부가 하던 일을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더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 이재명이 내란 극복으로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해낸 민주주의 수호자란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그의 조치에 좀 더 눈길이 간 것뿐이다. 그가 민주주의 핵심 가치를 지키는 일에 과거 정부와 달리 적극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조금 생긴 것뿐이다. 표현의 자유·언론의 자유 통제는 더불어민주당 대 국민의힘의 문제도, 진보 대 보수의 문제도 아닌 권력 대 시민의 문제다. 권력은 본래 그런가 보다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허위·가짜 정보까지 보호하는 건 아니다”라고 한 이재명의 견해는 진지하게 토론해볼 가치가 있다. 정부가 처벌하려는 허위정보에는 권력 비판이 포함된다. 허위정보 처벌은 비판할 자유, 진실에 다가가는 노력을 처벌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당시 세상은 MBC 보도를 의심하고 공격했다. 박근혜 국정농단 의혹, 초기 비상계엄설은 허위정보나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만일 가짜뉴스, 허위정보를 이유로 보도를 금지하거나 발언을 처벌했으면 우리는 영영 진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거짓, 오류는 진실을 손에 쥐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다. 계몽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진리가 오류와 충돌해야 진리를 시험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류조차 값지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의 핵심이라고 하는 건 이 자유가 다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위한 정치적 토론을 할 수 없고, 그 결과, 주권 행사가 침해된다.

집권세력은 자신들이 내놓은 법을 ‘허위조작정보근절법’이라고 명명했다. 법을 하나 뚝딱 만들어내면 인간 세상에서 허위정보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건 인간이라는 기계의 잘못된 설계도를 뜯어고치겠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확신편향, 반확신편향과 같은 인지편향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은 진실과 거짓의 칼 같은 극단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 사이 넓은 회색지대에 거처한다. 역사는, 오늘의 진실이 내일의 거짓이 되고, 오늘의 거짓이 내일의 진실이 된 기록으로 넘친다.


표현의 자유는 권력·기득권에 해롭지 않은 표현을 할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공격을 유발하는 말을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공격하는 것, 다른 사람이 억압하려 할지도 모르는 정보를 알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지도 모르는 관점들을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진실만을 말하는 세계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세계를 원한다면 법 개정이 아니라 세계 개조를 해야 한다. 거짓 없는 세계에 혹시 금붕어가 살지 몰라도 인간은 살지 않는다.

이대근 우석대 석좌교수

이대근 우석대 석좌교수

이대근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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