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일 정부과천청사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에서 직원들이 옛 방송통신위원회 현판을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이재명 대통령이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초대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방미통위) 위원장으로 지명하자 국민의힘이 일제히 ‘비토’에 나섰다. ‘정치적 편향성이 짙은 폴리페서(정치교수)’라는 이유에서다.
“명백한 언론 장악 시도이며,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정치적 인사다.”(국민의힘 미디어특별위원회)
“방미통위가 정파적 인사들로 채워지는 순간, 정권 홍보, 여론 통제, 이재명 방탄의 컨트롤타워가 된다.”(최보윤 국민의힘 수석대변인)
말인즉슨 맞다. 방미통위의 생명은 독립성에 있다. 그래야 정치권력으로부터 방송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 당연히 “극단적 정파성을 드러낸 인물”로 채워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할 소리는 아닌 듯하다. 합의제 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방미통위의 전신)를 철저하게 정치로 오염시키고 망가뜨린 자들이 누구인가.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3명의 방통위원장을 임명했다. 이동관, 김홍일, 이진숙이다. 이들이 ‘주군’에게 ‘어용 방송’을 헌납하기 위해 벌인 목불인견의 막장 행태는 논외로 하고 이들의 면면만 살펴보자.
먼저 이동관의 이력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 캠프 공보단장, 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 청와대 홍보수석, 윤석열 대선 후보 캠프 미디어소통특별위원장, 20대 대통령직인수위 특별고문…. 참 화려하기도 하다. 방통위원장 후보자 지명 당시엔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보였다. 대통령의 참모가 방통위원장으로 직행한 것이다.
김홍일은 윤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검사 선배’로 꼽는 인물로, 윤석열 후보 캠프에서 정치공작진상규명특별위원장을 맡았다. 이진숙도 윤석열 후보 캠프에서 언론특보와 시민사회총괄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국민의힘에선 선거 캠프 이력이 방통위원장 필수 자격 조건이라도 되나.
국민의힘이 김 후보자를 폴리페서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이렇다. 박근혜 정부 시절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를 비판하고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 중단을 두둔하는 등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5년 전 더불어민주당 추천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 추천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문제 삼았다.
앞으로 인사청문 과정에서 추가적인 ‘폴리페서 행보’가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제기된 건 이 정도다. 선거 캠프 출신을 줄줄이 내리꽂아 방통위를 대놓고 정치판으로 만든 자들이 “극단적 정파성” 운운하며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방미통위설치법은 ‘방미통위의 독립적 운영’을 목적으로 못박고 있다. 방미통위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방송·통신 규제기구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방미통위가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보수 정권에선 정치인을 위원장으로 임명해 정치적 독립의 외관마저 훼손하는 일이 잦았다. 독립성 보장을 위한 ‘입법적 결단’이라 할 수 있는 ‘합의제’는 껍데기만 남은 지 오래다.
뭐가 문제였을까. 핵심은 정파성이 잉태된 위원 선임 구조다. 방통위는 5명의 위원 중 3명을 대통령과 여당이, 2명을 야당이 추천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대통령이 위원장을 포함해 2명을 지명한다. 정치색 짙은 인사들이 위원으로 선임되기 쉬운 구조다. 여당 위원들은 대통령과 여당의 의중을 살피느라 바쁘고, 야당 위원들은 ‘닥치고 반대’를 일삼는다. 토론을 통한 합의는 언감생심이다.
정책 결정이 늘 다수결에 의해 이뤄지니 ‘쪽수’에서 밀리는 야당 위원들은 합의제의 알리바이로 동원될 뿐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가 공수를 교대해가며 ‘언론 장악 앞잡이’라고 방통위를 맹비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의힘이 김 후보자에 대해 ‘묻지마 비토’에 나선 것도 방미통위의 이런 구조적 결함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고 여당이 방통위 개편을 추진할 때 ‘정파적 선임 구조’도 바뀔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실제 민주당은 야당 시절 특정 정당이 위원의 다수를 점할 수 없도록 하는 방통위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합의제 정신을 실질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방미통위법은 위원 수를 5명에서 7명으로 늘렸을 뿐, 여당 우위 구도(여야 4 대 3)는 그대로다.
대통령이 위원장을 포함해 2명을 지명했으니, 이제 국회가 5명을 추천할 차례다. 그중 1명만이라도 여야가 합의해 추천하면 어떨까. 지금으로선 그것만이 방미통위를 정쟁의 수렁에서 구해낼 유일한 길이다. ‘17년 적폐’ 방통위의 흑역사를 더 이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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