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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한 말씀 던지신다. “네 핸드에서 폰을 떼어놓아라.”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사람이 전화를 하는 것은 지금 자기와 함께 있지 않은 누구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를 떠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지금 여기이신 한님을 등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너에게 남은 시간 얼마 안 된다. 이제부터 언제 어디서나 나하고만 있어라.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한테서 나만 보라는 얘기다.” 예, 어머니. 제가 그럴 수 있게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잘 관(觀)토록 하겠습니다. “보는 것도 네가 보는 것 아니다.” 아, 예. 물론입지요. “하지만 네가 먼저 나를 돕지 않으면 나도 너를 도울 수 없다. 너와 나의 관계를 결정하는 건 네 몫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예, 압니다. 당신은 해처럼 앞만 있으시고 저는 앞뒤가 따로 있어서 당신은 저를 등지실 수 없지만 저는 언제든지 당신을 등질 수 있으니까요. “됐다, 알았으면 그대로 하여라. 네가 나를 등졌어도 내가 네 앞에 없는 건 아니다. 네 말대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멘! 고맙습니다. 한님 어머니.
-“일분 전의 일도 없는 일이다. 일분 뒤의 일도 없는 일이다. 그걸 문제 삼아 시비(是非)하고 염려하는 자들한테 속지 마라. 네가 할 일은 그의 말이나 생각에 엮이지 않으면서 그에게도 내 사랑이 흐르도록 나를 돕는 것이다. 네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것을 잊지 마라. 빛도 소금도 스스로 만든 경계가 없다. 빛은 어둠의 양과 질을 따지지 않고 소금은 국이냐 죽이냐를 가리지 않는다. 빛은 방향이 없고 소금은 걸어서 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매사에 네가 내 안에서 죽어 내가 너로 살게 해다오.” 예, 어머니. 저 또한 간곡히 바라는 바입니다. 한치 어긋남 없이 당신 뜻을 이 몸으로 이루십시오. 제자의 노래 “마지막 문을 나설 때 환하게 웃으리”를 부르는데 한 말씀 보태신다. “마지막 문을 나설 때가 장차 네가 죽을 때를 가리키는 거냐?” 예, 어머니. “다시 생각해보아라. 그때가 너에게 장차 올 때냐?” 아하, 알겠다! …아닙니다, 어머니. 그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됐다. 장차 올 때란 없는 것이다. 지금이 모든 때요 여기가 모든 곳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세상에서 하는 마지막 행위인 줄 알고 하여라.” 예, 어머니. 고맙습니다.
-“너는 눈에 보이지 않고 먼저도 나중도 없는 영(靈)과 눈에 보이고 시작과 끝이 있는 육(肉)의 합성(合成)이다. 육과 영이 아니라 영과 육이다. 육이 영을 품은 게 아니라 영이 육을 입은 거다. 그것도 아주 잠시. 너는 영으로 사는 육이 아니라 육으로 사는 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디에도 없어서 어디에나 있는 사랑이 지금 여기에만 있는 물질로 저를 살고 살리는 거다. 그러니 두려워마라. 세상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 너를 해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영은 기쁘고 슬프고 평안하고 아프다. 육이 기쁘고 슬프고 평안하고 아픈 것 아니다. 그날 라사로 무덤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나의 육이 아니라 영이었다. 육은 아무 한 일이 없어 죄가 없고 영은 한님을 거스르지 못해 또한 죄가 없다. 그러니 천상천하에 무엇이 두렵겠느냐? 안심하고 사랑이신 한님 어머니를 잘 모셔라.” …아멘.
‘제자의 노래’ 가사 “마지막 문을 나설 때”가 “마지막 문을 나서며”로 바뀐다. “나설 때”라는 말이 장차 올 어느 날을 가리키는 미래형으로 들릴 수 있어서 현재형 “나서며”로 바꾼 게 아니라 바뀐 것이다. 육(肉)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영(靈)은 시종(始終)이 없어 영원한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세상천지에 어느 누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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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채플에서 어머니 한님이 한말씀 들려주신다. “다만 네 판단을 멈추라고 했지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둥근 구슬 한 손에 잡고 푸름과 붉음을 분별한다고 했다. 섬세한 지혜로 분별하되 그 분별 너머 큰 사랑의 품에 안겨라. 여기에 하늘과 땅으로 만들어진 너의 길이 있다.” …절묘하다. 아침 책상에 앉아 옮기는 오즈월드 체임버스의 글이 같은 말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요한일서 1:7) 자신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오복음 5장 48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델은 선한 사람이나 선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이었다.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연 당신처럼 온전한지 아닌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시며 당신이 사람들을 대하듯이 그들을 대하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복음 15:12).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그의 선한-행실(good-doing)이 아니라 하느님-닮음(God-likeness)에서 나타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삶은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의 삶으로 표출된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치고 용서 빌고 용서받고 그러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것이 인생인가?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손가락질하여 비난하지 않으리라. 할 수 있는데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많은 허물이 있는 인간이기에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오, 한님. 저로 말미암아 상처입고 괴로웠던 영혼들이 있다면 부디 저를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다시는 넋 놓고 살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관옥나무도서관이 ‘관옥스테이’라는 걸 한다기에 월요일 부산에서 작은 연주(演奏)가 있는 효선과 함께 겸사겸사 순천으로 내려온다. 자허당에 들어 잠시 낮잠 자다가 한말씀 듣는다. “보아라, 네가 누구 편도 들지 않으니 아무도 너를 편들지 않지 않느냐?” 잠은 끊어지고 말은 이어진다. “누구 편도 들지 말고 누가 네 편이기를 바라지도 마라. 빛도 소금도 아무 편이 아니다. 그것들은 목표도 방향도 없다.” 아멘. 그거야말로 저로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이지만 저에게 ‘나’가 없으면 그러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제가 내세울 ‘나’라는 것이 본디 없음을 순간순간 잊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시골 언덕 작은 교회당에서 불경(佛經)을 읽는다. 누가 읽는지는 모르겠다. 말하자면, 주인공 없이 엉뚱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거다.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엉뚱하지 않다. 교회당에서 석가의 가르침을 읽고 절에서 예수의 길을 묻는 게 ‘현실’에서는 엉뚱해 보여도 ‘진실’의 차원으로 내려가면 석가가 예수고 예수가 석가이니 당연한 일이다. 독경의 주인공 또한 없는 것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는 보이지만 그를 통해 ‘외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에게 젖 먹이는 어미는 보이지만 젖 먹이는 어미 몸으로 넘치며 흐르는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는 병사들은 보이지만 그렇게 저를 나타내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겉모양의 ‘현실’만 보지 말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아라. 애쓰지 않아도 사랑과 연민의 아바타로 살게 될 것이다. 땅에서 하늘시민으로 사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아멘.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공동체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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