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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국민연금 존재 이유는 노후소득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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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국민연금 존재 이유는 노후소득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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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리셋코리아 경제분과장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리셋코리아 경제분과장

두 달 넘게 1400원대를 맴돌던 원·달러 환율이 이제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0원을 위협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경험해 보지 못한 숫자다. 그러나 지금의 공포는 과거와 결이 다르다. 과거의 위기가 예기치 못한 ‘급성 충격(블랙스완)’이었다면, 작금의 현실은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 저하와 미국의 구조적 호황이 맞물린 ‘만성 질환(회색 코뿔소)’이기 때문이다.



환율 방어용 ‘쌈짓돈’ 활용 안 돼

최근 원화가치 하락은 만성질환

경제체질 바꾸는 개혁해야 해소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이러한 고환율 고착화의 위기감 속에서 최근 기획재정부·한국은행·보건복지부·국민연금공단 등 4대 기관이 모여 연금의 수익성과 외환시장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뉴 프레임워크’ 구축을 발표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국민연금을 동원해 환율을 방어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시장은 이를 사실상 국민 노후자금의 외환 방어 투입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정부의 다급한 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현재 1322조원 규모인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잔액은 약 5300억 달러(약 771조원)에 달해, 4200억 달러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훌쩍 넘어섰다. 매년 해외투자를 위해 수백억 달러를 환전해 나가는 국민연금은 환율 상승을 부추기는 구조적 요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 거대한 ‘제2의 외환보유액’을 활용해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고 싶은 유혹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정부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환율 방어용 쌈짓돈’이 아니다. 연금의 존재 이유는 기금 증식을 통해 국민의 노후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다.

정부가 논의 중인 환헤지 비율 상향은 당장 외환시장에 달러를 공급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기금 운용 측면에서는 막대한 기회비용을 발생시킨다. 강달러 기조가 지속할 때 환헤지 비율을 높이면(달러 매도), 추후 환율 상승 시 누릴 수 있는 환차익을 포기해야 하고 헤지 비용까지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 2200만 가입자의 수익률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더욱이 지금의 환율 상승은 국민연금 탓만이 아니다. 올해 누적 순매수액이 301억 달러에 달하는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쏠림, 2020년 펜데믹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2배에 달하는 통화량(M2) 증가율(43.3%), 미국보다 1.5%포인트 높은 기준금리, 미국과의 관세협상에 따른 향후 10년간 매년 200억 달러의 대미 현금투자, ‘트럼프 트레이드’ 확산 등 글로벌 거시경제 환경 변화로 인해 달러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것은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이 해외투자를 위해 보유한 달러를 선물환 시장에서 매도(환헤지)하거나, 신규 투자용 달러를 한국은행에서 빌려 쓰는 스와프 방식은 외환시장에 일시적으로 달러 공급을 늘리는 효과는 있다.

하지만 이는 진통제일 뿐 치료제가 아니다. 펀더멘털이 약화된 시장의 흐름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자칫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신호를 줄 경우, 장기적으로는 연금 수익률을 갉아먹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마저 잃는 소탐대실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국민연금과 한국은행 간의 외환 스와프 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하여 시장의 변동성을 완화하는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 수준에서 협력해야 한다. 기계적인 환헤지 비율 상향 등 인위적인 자산 배분 개입은 지양하고, 기금운용위원회의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매력적인 한국’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 자본시장의 수익률과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실효성을 제고하고, 노동과 기업 규제를 과감히 혁파해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이 살아나 외국인 자금이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환율 안정책이다. 환율 1500원 시대, 정부는 국민연금이라는 당장 손대기 쉬운 카드에 기대기보다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고통스러운 개혁에 집중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리셋코리아 경제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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