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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쪽 땅끝. 국토지리정보원이 그렇게 인정한 그곳에 ‘동끝횟집’이 있다. ‘동쪽 땅끝’의 맨 앞과 맨 뒤의 글자를 가져온 가게다. 5일 오전. 그 집 사장님은 출타 중이었다.
‘동끝카페’에 이어 또 다른 ‘동끝 시리즈’인 ‘동끝바다낚시터’에 들를 즈음 뒤에서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횟집 사장님으로 변신한 ‘양신’ 양준혁(56)이었다. 대한민국 프로야구를 들었다 놨다 했던 그의 큼지막한 손에는 상추와 깻잎·도토리묵 등이 들려 있었다. “장 보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직접 장을 봐요. 직접 하지 않으면 가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야구의 신이라, 줄임말로 양신. 그가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그러니까 ‘동쪽 땅끝’으로 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수산업에 올인하려고요.” 그의 말투는 단호했다.
‘양신’에서 ‘방신’으로…야구 스타 양준혁의 인생 2막
방어 양식장 사장으로 변신한 양준혁씨가 5일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양식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객원기자 |
우리나라 동쪽 땅끝. 국토지리정보원이 그렇게 인정한 그곳에 ‘동끝횟집’이 있다. ‘동쪽 땅끝’의 맨 앞과 맨 뒤의 글자를 가져온 가게다. 5일 오전. 그 집 사장님은 출타 중이었다.
‘동끝카페’에 이어 또 다른 ‘동끝 시리즈’인 ‘동끝바다낚시터’에 들를 즈음 뒤에서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횟집 사장님으로 변신한 ‘양신’ 양준혁(56)이었다. 대한민국 프로야구를 들었다 놨다 했던 그의 큼지막한 손에는 상추와 깻잎·도토리묵 등이 들려 있었다. “장 보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직접 장을 봐요. 직접 하지 않으면 가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야구의 신이라, 줄임말로 양신. 그가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그러니까 ‘동쪽 땅끝’으로 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수산업에 올인하려고요.” 그의 말투는 단호했다.
삶은 러닝머신, 과거 얽매이면 뒤로 가
양준혁씨가 직접 운영하는 경북 포항시 방어 양식장 전경. 송봉근 객원기자 |
Q : ‘올인’이라뇨.
A : “야구와 방송은 다 제쳐 놨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과거에 얽매이면 퇴보하는 겁니다. 러닝머신이 열심히 도는데 가만있으면 밀려 나가지 않습니까.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의 ‘올인’이란 말 속에는 ‘이미 전부터 해왔다’는 뜻도 감지됐다.
Q : 수산업은 어떤 계기로 얼마나 했습니까.
A : “선수 시절 낚시가 취미였어요. 2000년대 초 여기에 낚시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광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팔딱 올라오더군요. 그 생명력이란. 순간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저기, 저 양식장을 샀습니다. 1만㎡(약 3000평)에 달합니다. 우리나라에 10여 곳만 있는 축제식(築堤式) 양식장입니다. 둑을 쌓되 밑으로는 바닷물이 들어오게 하는 거죠. 가두리양식보다 운영도 효과적이고, 무엇보다 고기가 탱탱하게 잘 자랍니다. 20년 조금 지났네요.”
Q : 지금 방어가 제철입니다. 이 방어로 ‘방어의 신’이 됐다죠.
A : “초기에는 줄돔과 우럭·전복 등을 키웠지만 번번이 실패했어요. 이후 방어를 주력으로 삼았습니다. 하루 사료비만 200만원입니다. 아끼지 않습니다. 양식 환경도 훌륭하다고 자부합니다. 2023년 말에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우리 방어를 선보이자고 했어요. 자신 있으니까요. 당시 시세가 1㎏에 2만5000원 정도였는데 3만8000원에 낙찰됐어요. 롯데마트에서 대방어회 행사를 연 것도 그때쯤이었죠. 발음을 이상하게 하면 정말 이상해지지만, 주위에서 ‘방신’이라고도 하더군요. 뭐, 재밌자고 만든 별명이니, 부르기 나름이죠(웃음).”
그래픽=이현민 기자 |
‘양 사장’이 수산업에 뛰어든 20여 년 전, 그는 여전히 그라운드에서 뛰는 현역 야구선수였다. 프로야구와 양식장 운영이 대략 5~6년 겹친다. 그는 1993년 데뷔해 18시즌 동안 프로야구에 남을 기록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출전·안타·홈런·타점 등 무려 10개 부문에서 개인 통산 1위 기록을 남겼다. 이후 이승엽 등 후배들이 그 기록들을 경신했지만 최다 볼넷과 최다 고의사구는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그래픽 참조〉
2010년 9월 19일. 대구에서 열린 은퇴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양준혁은 2루 땅볼을 치고 전속력으로 1루를 향해 뛰었다.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곤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Q : 수많은 기록 중에 최다 볼넷 기록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신다죠.
A : “맞습니다. 그렇다고 제 기록이 절대적이라는 건 아닙니다. 제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 겁니다. 또 깨져야 하고요. 저는 대학(영남대)도 다녔고, 군대(상무)도 다녀왔습니다. 고졸 신인보다 7~8년 덜 뛴 거죠. 고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뛰었다면 몰라도요. 그래도 저는 늘 팀을 위해 뛰었다고 자부합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바로 볼넷입니다. 타자는 누구나 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승엽 같은 뛰어난 선수가 제 다음 타순이기에 어떻게든 출루해 밥상을 차려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엔 빛이 안 나는 기록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그런 야구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Q : 현재의 사업에도 유효한 철학인가요.
A : “물론입니다. 은퇴 경기 때도 결코 설렁설렁 뛰지를 않았어요. 언제나 전력 질주를 했습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평범한 타구인데, 1루로 향하는 저의 질주에 내야수가 당황하면 실책을 저지를 수도 있죠. 팀을 위해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저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강구항으로 향합니다. 고기를 살피러 가는 거죠. 요즘은 겨울 출하 시기라 방어를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갑니다. 그래야 시장이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몸부터 느낄 수 있어요.”
전력 질주와 함께 그가 내세우는 또 다른 사업 철학은 ‘변화’다. 그는 부진할 때면 타격 자세에 변화를 주면서 고비를 넘기곤 했다. 프로 초기 ‘찍어치기 타법’부터 그 유명한 ‘만세 타법’, 그리고 ‘탈수기 타법’도 그런 노력 끝에 나왔다.
Q : 만세 타법도 유명하지만, 조금씩 혹은 크게 변화를 주기도 했습니다. ‘변화’에 대한 신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A : “야구도 마찬가지고, 어떤 일이든 한가지로 쭉 가면 좋지만, 그게 됩니까. 사람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시대에 맞춰서 가야죠. 명품이 왜 명품이겠습니까. 신상품이 계속 나와야 명품의 가치도 유지되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가 멈춰 있으면 유지도 아니고 퇴보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죠. 프로야구 은퇴하고, 방송일 하고, 이제 새롭게 수산업을 하는 겁니다. 방송과 야구는 다 접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얼마나 야구를 하고 싶겠어요. 하지만 싹 정리했습니다. 허울만 온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귀어 귀촌한 겁니다. 미련을 가지면 힘들고 고달픕니다. 앞을 봐야죠.”
Q : 그럼 (양준혁 스포츠)재단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
A : “재단은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하면 되니까요.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재단도 새로워져야 하니까요.”
연 매출 30억, 처음엔 손해도 많이 봐
양준혁씨가 자신의 양식장에서 기른 방어를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양준혁] |
그가 운영하는 동끝횟집의 메뉴판에는 ‘양신 방어’라고 적혀 있었다. 가게 한쪽엔 그가 현역으로 뛰었을 때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2층 카페에도 야구와 관련된 소품이 꽤 전시돼 있었다.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지만, 현재의 그를 있게 한 건 결국 야구였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양신이야말로 등 번호 10번이 영구 결번될 정도로 푸른 피가 흐른다는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프로야구계의 레전드 스타이지 않았나. 그런데 ‘등 푸른’ 방어로 인생의 또 다른 반전을 꾀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우연인지, 필연인지.
Q : ‘동끝’이란 이름은 직접 지으신 겁니까.
A : “네. 제가 지었습니다. 여기가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우리나라 동쪽 끝입니다. 저 양식장 너머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곳인데, 안전 대책을 지자체에서 마련해 주면 좋겠다 싶습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테마파크를 지을 계획도 갖고 있고요. 그때까지는 방어로 잘 버텨야 할 텐데요.”
Q : 투자금을 회수하지 않으셨습니까.
A : “글쎄요. 초기에 워낙…. 양식장이 크다 보니 손실도 컸죠.”
일각에선 그가 ‘야구로 번 돈을 다 날렸다’는 말도 들리는데, 그는 현재 연 매출이 30억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양신은 돈 얘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이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끊임없는 변화 속, 양신의 전력 질주가 이곳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은 평균자책점으로 불리는 상대 투수의 ‘방어율’을 제법 높여준 타자가 ‘방어’로 일어섰다니. 그렇다면 ‘양신’은 ‘양식의 신’의 줄임말이 되기도 하는 건가.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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