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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안 보이고 ‘추구미’만 보였다···다카이치의 ‘마운팅 패션’ [이윤정 기자의 ‘소소(小騷)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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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안 보이고 ‘추구미’만 보였다···다카이치의 ‘마운팅 패션’ [이윤정 기자의 ‘소소(小騷)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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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경향신문 자료사진·AFP연합뉴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경향신문 자료사진·AFP연합뉴스


고대 정치에서 옷은 말보다 강력했다. 고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지혜의 여신 이시스의 복장을 즐겨 입어 사제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신적 권위를 입은 전략은 국내에서는 통했지만, 외교 무대에서는 오만과 기만으로 비쳤다. 결국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주권을 잃었다. 패션은 설득보다 오해를 부를 때가 많고, 그 오해는 종종 더 큰 반작용을 낳는다.

이 오래된 역설은 현대 정치에서도 반복된다. 최근 일본에서는 ‘패션 외교’ 논란이 벌어졌다. 시작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SNS에 올린 글이었다. 그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길에 오르며 “세탁소에서 찾아온 옷들 사이에서 값싸게 보이지 않는 옷을 고르느라 몇시간을 보냈다” “외교 협상에서 기죽지 않으려면 무리해서라도 좋은 옷 한 벌쯤은 사야 하는 걸까”라는 글을 적었다. 그러면서 ‘마운트를 잡을 옷’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총리가 외교 전략이 아닌 ‘패션 고민’을 대대적으로 공개한 것 자체가 공적 감각의 결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 선 ‘마운트’라는 표현은 격투기에서 상대를 깔아뭉개듯 올라타는 자세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상대보다 우위에 서려는 뜻의 속어로 사용되는 단어다. 외교가 상호존중을 전제로 하는 영역임을 고려하면, 총리의 단어 선택은 상황 인식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외교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다”라고 비판했고 “옷으로 서열을 만들겠다는 사고방식이 부끄럽다”며 일침을 놓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앞서 “대만 유사시 일본이 개입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드는 등 외교 감각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퍼스널이미지 브랜딩 LAB & PSPA의 박영실 대표는 “외교는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SNS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동물적인 표현을 쓴 것 자체가 결례”라며 “의도적으로 강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라 할지라도 리더의 옷차림과 언어는 결국 국가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인 만큼, 오해를 불러올 표현”이라고 짚었다.

지난 11월 23일(현지시간) G20에 참석한 다카이치 총리. 패션 트레이드 마크인 파란색 정장, 진주목걸이, 가죽 가방을 들었다. AP연합뉴스

지난 11월 23일(현지시간) G20에 참석한 다카이치 총리. 패션 트레이드 마크인 파란색 정장, 진주목걸이, 가죽 가방을 들었다. AP연합뉴스


다카이치 총리는 평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존경한다고 밝히며 ‘대처 패션 스타일’을 따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대중에 각인된 패션은 파란색 정장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가죽 가방을 든 조합이다. 일본판 ‘철의 여인’을 꿈꾸는 그가 강렬한 색채 정장으로 단호함을, 은빛 진주 목걸이로 온화함을 동시에 보여주려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남성 정치인들은 가방을 직접 드는 일이 거의 없다”면서 “보통 비서가 드는 가방을 다카이치 총리나 대처 전 총리는 직접 들어 ‘일하는 여성’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외교적 비판을 받은 다카이치 총리는 정작 일본 내에선 지지율 상승 효과를 얻고 있다. 강경한 이미지와 직설적 메시지로 보수층 결집을 노린 것인데, ‘내부 결속’과 ‘외부 마찰’을 동시에 강화하는 전형적 포퓰리즘 전략을 활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혜미 이미지평론가는 “보수적인 일본에서 첫 여성 총리는 마치 남성만 있는 운동부를 여성 주장이 이끄는 느낌일 것”이라며 “다카이치 총리는 화려한 패션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테토녀’(여장부) 이미지만 구축하려 할 뿐, 정작 어떤 정책이나 정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2000년 6월 23일 평양 방문 직후 청와대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0년 6월 23일 평양 방문 직후 청와대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패션이 외교를 빛낸 순간들도 분명 존재한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1937~2022)은 1999년 한국을 방문할 때 김대중 정부 당시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기 위해 햇살 모양의 ‘선버스트’ 브로치를 착용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2022)은 방문국의 국기 색을 의상에 반영해 우호적 제스처를 은근하게 전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말했듯, 패션은 즉각적인 언어다. 정치인에게 옷차림은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이자 가장 먼저 읽히는 메시지다. 그러나 그 언어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겉모습을 넘어서는 내적 일관성이 필요하다. 결국 정치 무대에서 오래 남는 것은 ‘마운트를 잡는’ 의상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신념과 태도라는 점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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