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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우경임]‘스무고개’로 나온 숫자 의대 증원 2000명

동아일보 우경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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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우경임]‘스무고개’로 나온 숫자 의대 증원 2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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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임 논설위원

우경임 논설위원

12·3 비상계엄 선포 직전 열린 ‘5분 국무회의’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발언하는 동안 국무위원 10명 중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을 조용히 경청했고, 계엄 지시 문건을 공손히 받았다. 영상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감사원이 최근 공개한 ‘의대 증원 추진 과정’ 감사 보고서는 ‘5분 국무회의’ 같은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일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의대 2000명 증원이 결정됐다’는 감사 보고서의 결론보다 행간에 담긴 상식을 벗어난 국정 운영에 놀라고 말았다. 윤 전 대통령은 한 번도 2000명이라는 숫자를 콕 찍어 지시한 적이 없었다. 대통령실 참모, 정부 관료가 거친 성정의 대통령을 거스를까 마치 ‘스무고개’를 풀 듯이 집단 지성을 발휘한 결과였다.

“충분히 증원” 대통령 지시 맞히기

의대 증원 방안의 첫 보고는 2023년 6월이었다. 2025년부터 매년 500명씩 늘리는 방안이었다. 이에 대해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대 증원에 관한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여 보는 차원에서 이전 정부에서 추진한 연 400명 증원을 참고해 제시한 숫자”라고 진술했다. 처음부터 과학적 추계나 의료계와의 합의는 제쳐두고 대통령의 뜻을 알아보려는 ‘간 보기 숫자’를 내밀었단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그것 가지고 문제 해결이 되겠나. 1000명 이상은 늘려야 하지 않겠나”고 이를 반려했다.

복지부는 같은 해 10월 대통령 보고 초안을 다시 만들었다. 이번에는 2025년부터 3년간 매년 1000명씩 늘리고 이후 정원을 재조정하겠다고 했다. 이를 사전에 검토한 안상훈 당시 대통령사회수석비서관이 “1000명 정도로 보고하면 혼날 수도 있다”며 박민수 당시 복지부 2차관에게 다시 만들라는 뜻을 전달했다.

대통령실 참모가 정책적 합리성도, 정무적 판단도 아닌 단지 대통령에게 혼날까 봐 수정을 지시했는데 그 지시가 또 통했다. 복지부는 초안을 고쳐 3년간 1000명씩 늘리고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 2000명을 증원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필요한 만큼 충분히 더 늘려라”고 재차 지시했다. 그 자리 참석자 누구도 대통령에게 ‘충분히’의 뜻을 묻거나 적정 증원 규모나 의대 교육 여건을 설명하지 않았다.

누구도 “안 된다” 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보고가 퇴짜 맞자, 조 전 장관은 “대통령이 충분한 증원을 계속 지시했는데 복지부 장관으로서 충분히가 어느 정도인지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주무 부처 장관 고민의 수준이 이랬다. 그제야 복지부는 보고서 3건을 종합해 2035년 부족 의사 수 1만 명이라는 근거를 찾았다.


복지부의 ‘1만 명 부족’ 추계를 보고받은 이관섭 당시 정책실장은 ‘2000명’이라는 숫자를 처음 꺼냈다. 조 전 장관에게 “첫해부터 2000명 일괄 증원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복지부는 이를 반영해 같은 해 12월 ‘900∼2000명 단계적 증원안’과 ‘2000명 일괄 증원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단계적 증원안에는 반대했고 일괄 증원안에는 “더 검토를 해보라”고 지시했다. 지난해 2월 6일, 복지부는 대통령이 비토하지 않은 ‘2000명 증원안’을 대통령의 뜻이라고 보고 발표했다.

그리고 1년 7개월간 의정 갈등으로 온 나라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토론은커녕 지시에 토도 달지 못하니 의대 증원 같은 비합리적인 정책이 나오고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처럼 국력이 낭비됐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계엄으로 폭주했다. 직에 걸맞은 책임감이라고는 없던 ‘예스맨’ 관료들의 비겁함도 동력을 제공했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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