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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 박재동 화백, 피해자에 5000만원 배상" 확정

이데일리 성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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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 박재동 화백, 피해자에 5000만원 배상"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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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녹취록·대화내용 SNS 유포 불법행위 인정
"개인정보·사생활 침해하고 명예 훼손" 원심 유지
소송 방어권 명분 자료 유출, 정당행위 주장 기각
"법적절차 악용 괴롭힘 제동"…2차가해 예방 판결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피해자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를 무단으로 유출해 2차 가해를 한 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피해자에게 5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소송 과정에서 취득한 피해자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건네 SNS에 게시하도록 한 행위는 명백한 불법행위라는 뜻이다.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사진=뉴스1)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사진=뉴스1)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대법관 박영재)는 전날 만화가 이태경 작가(본명 이유미)가 박재동 화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로써 박 화백이 소송 과정에서 입수한 이 작가의 비공개 자료를 유출하고, 이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비방과 조롱 등 2차 가해를 유발한 행위에 대해 5000만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한 항소심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피해자가 법원에 제출한 소송자료가 SNS에 유포돼

이 사건은 이태경 작가가 박재동 화백의 성추행 사실을 증언한 뒤 시작됐다. 2018년 2월 이 작가는 SBS 뉴스에 “2011년 8월경 주례를 부탁하러 갔다가 박 화백으로부터 치마 아래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쓰다듬는 성추행을 당했다”고 제보했다. 이 내용이 방송되자 박 화백은 SBS를 상대로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문제는 이 소송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 작가가 피해 입증을 위해 법원에 제출한 통화 녹취록과 카카오톡 메시지 등이 박 화백 측을 통해 ‘With 박재동 아카이브’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던 박모씨에게 유출됐다. 해당 자료들은 편집·왜곡되어 2019년 8월부터 9월까지 SNS에 게시됐다. 피고의 지인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도 2020년 6월부터 8월까지 이 자료들을 페이스북에 게시했다. 박 화백 역시 김민웅 상임대표의 게시물들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이 작가는 2019년 5월 정정보도사건 증인신문 당시 “증거물이 With 박재동 아카이브를 통해 법원 밖으로 빠져나가 저를 장외 공격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며 2차 가해를 우려했다. 그럼에도 법원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자료를 제출했으나, 결국 이 자료들이 SNS에 유포되면서 심각한 인신공격이 이어졌다.

1심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침해” 인정

1심은 2024년 11월 박 화백이 피해자에게 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정정보도사건 수행을 조력한 박모씨에게 소송자료를 공유해 페이스북에 공개하도록 했거나 적어도 이를 방조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개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방식과 내용은 개인의 인격주체성을 특정 짓는 사항으로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보호대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피고는 사적 대화가 포함된 소송자료를 박모씨에게 공유해 다수의 사람들에게 누설하게 함으로써 원고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 또는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또한 “피고는 소송자료 중 일부분을 발췌해 전체적인 취지에 반하거나 이를 왜곡하는 글을 통해 원고 진술 피해사실이 허위사실인 것처럼 게시함으로써 원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이는 정당한 방어권 행사로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2심 “명예훼손도 인정”…1심 유지

2심은 지난 8월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2심 재판부는 “피고가 페이스북에 공유한 게시물은 단순히 녹취록, 메시지 내용의 일부만을 발췌한 것이 아니다”라며 “작성자의 의견이나 주관적 평가 등을 포함하고 있어 전체적인 취지와 다르게 오인될 수 있도록 작성됐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를 통해 게시물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고가 주장하는 피해사실이 거짓이라는 인상이 들게끔 했다”며 “게시물에는 ‘원고의 성폭력 피해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묵시적으로 포함돼 있고 이는 원고의 품성, 덕행, 신용 등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봤다.

피고 측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행위”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소송자료 제공행위나 게시물 공유행위의 동기, 목적, 횟수, 경위, 게시물 내용, 다른 수단의 대체 가능성 등에 비추어 볼 때 정당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적 절차 내 2차 가해에 제동 건 판결”

대법원은 “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이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상의 심리불속행 사유에 해당하거나 법률상 이유가 없다”며 피고 박 화백의 상고를 심리불속행 기각했다.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하도록 했다.


이번 소송을 이끈 하희봉 로피드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확정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자료가 가해자에 의해 도리어 공격 수단으로 악용되는 ‘법적 절차 내 2차 가해’에 대해 사법부가 엄중한 제동을 걸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 변호사는 “특히 소송 방어권이라는 명분으로 피해자의 내밀한 개인정보를 유출하거나 여론전에 이용하는 행위가 명백한 위법임을 최고법원이 최종 확인했다는 점에서, 향후 유사한 형태의 2차 가해를 예방하는 중요한 판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성폭력 피해자가 관련 사건에 증거로 제출한 대화내용을 무단으로 유출하여 제3자로 하여금 SNS에 게시한 행위가 불법행위를 구성하고,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 핵심”이라며 “금액도 다소 크고, 이런 내용으로 불법행위가 인정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미투 운동 이후 이어진 기나긴 법적 공방이 피해자의 승소로 마무리되었다”며 “이는 사법 절차를 악용한 괴롭힘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법원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편 이태경 작가는 “긴 법적공방이 의미있는 결실을 이루게 되어 기쁘다”며 “이번 확정 판결이 용기 내어 피해를 말한 이들이 법의 보호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정정보도사건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원고의 증언 신빙성이 인정돼 피고의 청구가 기각됐고, 2021년 2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확정된 바 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 방인권 기자)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 방인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