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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의 불편한 ‘책임 회피’ 단어들 [편집장 레터]

매경이코노미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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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의 불편한 ‘책임 회피’ 단어들 [편집장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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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계정 3370만개가 무단으로 노출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노출된 정보가 고객 이름과 이메일, 전화번호, 주소, 일부 주문 정보로 제한됐습니다.”

널리 알려진 쿠팡 사과문 일부입니다. 그나마도 웹사이트에 올라온 뒤 이틀 만에 사라졌습니다. 크리스마스시즌 세일 광고로 대체됐지요. 여러분들은 이 문구를 보고 ‘사과 받았으니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셨나요? 많은 분들처럼 저도 아닙니다. 화가 납니다.

‘무단으로 노출된 것이 확인됐다’는 표현부터 거슬립니다. 무단의 사전적 의미는 ‘사전에 허락 없음’입니다. 정보 유출범이 허락받고 했겠습니까? 쓸데없는 변명의 단어죠.

‘노출’ 역시 전형적인 책임 회피 단어입니다. 쿠팡은 정보 주체인 고객에게 ‘개인정보 노출’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표현합니다. 마치 쿠팡은 잘못이 없는데 누군가에 의해 밖으로 알려졌다는 식이죠. 유출이라는 단어를 쓰면 쿠팡이 잘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알고 보니 쿠팡은 ‘유출’이 아닌 ‘노출’로 표현하라는 방침을 사내에 전달했더군요. 고객 정보 관리를 못했으면 분명한 잘못입니다. ‘무단으로 노출된 것이 확인됐다’라고 중언부언 말고 ‘유출됐다’는 한마디면 됩니다.

언론이 다루지 않았지만, 저에게 더 불편하게 다가온 단어는 ‘제한’이었습니다. 쿠팡이 유출한 정보가 고객 이름과 이메일, 전화번호, 주소, 주문 정보로 제한됐다고 합니다. 결제나 신용카드 정보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겠죠.

그런데 이메일, 전화번호, 주소 정보만 유출되면 안전한가요? 쿠팡이 보유한 고객 정보는 소위 ‘찐’ 정보입니다. 회원 가입을 위해 입력한 이후 이사를 가든 전화번호를 바꾸든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정보가 아닙니다. 당장 오늘 아침 배송을 맡긴 정확한 정보지요. 대한민국이 ‘문앞’까지 탈탈 털렸는데 쿠팡은 ‘제한됐다’고 표현합니다. 이건 사과도 무엇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문앞까지 털렸는데 ‘제한’됐다니
‘노출’ 표현 부적절···잘못된 사과로 더 큰 위기
3370만명 정보가 유출되기 일주일 전쯤 쿠팡은 고객 4500명 정보가 새 나갔다고 밝혔습니다. 이때만해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4500만명이 아니고 4500명이라고? 이게 기삿거리가 되나” “4500명뿐이라면 정말 보안에 철저한 회사네” 등 우호적인 댓글이 줄을 이었죠. 쿠팡이 얼마나 사랑받는 브랜드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사과문을 보니 쿠팡은 고객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재계는 경영 파고를 넘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연말 재계 인사에서 ‘칼바람’이 불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죠. 작은 구멍이 배를 좌초시키듯, 잘못된 사과의 언어가 더 큰 위기를 부릅니다.

쿠팡은 지난해 41조원 매출을 올렸습니다. 거의 대부분 한국에서 벌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장에서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박대준 쿠팡 대표는 실질적인 지배자인 김범석 의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미국인 김 의장님, 모르쇠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제대로 사과하세요.


[명순영 편집장·경영학 박사 myoung.soonyo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8호 (2025.12.10~12.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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