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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 자전거로 시작된 기아 ‘80년 모빌리티 외길’…혁신은 여전히 진행형

헤럴드경제 서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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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 자전거로 시작된 기아 ‘80년 모빌리티 외길’…혁신은 여전히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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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경성정공’ 모태
車 산업 통폐합조치 등 역경 딛고
2020년대 모빌리티 선도 메이커 도약
정의선 ‘디자인·혁신경영’ 발전 원동력
“80년 역사 거울삼아 ‘이동’ 본질 가치 구현”
1962년 기아산업이 출시한 최초의 국산 삼륜차 ‘기아마스타 K-360’ [기아 제공]

1962년 기아산업이 출시한 최초의 국산 삼륜차 ‘기아마스타 K-360’ [기아 제공]



[헤럴드경제=서재근 기자] 지난해 한국을 대표하는 완성차 제조사가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창립 이래 사상 첫 연간 매출 100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글로벌 판매 역시 300만대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면서다.

‘창립 80주년’을 맞이한 기아가 그 주인공이다. 기아의 역사는 지난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12월 기술입국과 산업보국의 정신으로 김철호 창업자는 “가난을 추방하고 자주 국가를 세우는 길은 기계공업을 발달시켜 공업화를 실천하겠다“며 기아의 모태 ‘경성정공’을 창립했다.

이후 경성정공은 1952년 ‘아시아에서 일어난다(起亞)’는 뜻을 담아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바꾸고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피란수도 부산에서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생산했다.

1960년 자전거 사업 적자로 첫 부도를 맞았지만, 기아산업은 신제품 개발 의지를 꺾지 않았다. 끊임없는 연구 끝에 1962년에는 최초의 국산 오토바이 ‘C-100’, 최초의 국산 삼륜차 ‘기아마스타 K-360’ 각각 출시했다. 오토바이는 1960년대 당시 좁은 도로환경과 열악한 연료 사정에 알맞은 이동수단으로 자리매김했고, 삼륜차는 이 시기 대한민국 물류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기아산업이 1974년 생산한 첫 승용차 ‘브리사 S-1000’ [기아 제공]

기아산업이 1974년 생산한 첫 승용차 ‘브리사 S-1000’ [기아 제공]



기아가 지난 1993년 세계 최초로 출시한 도심형 SUV( ‘스포티지’ [기아 제공]

기아가 지난 1993년 세계 최초로 출시한 도심형 SUV( ‘스포티지’ [기아 제공]



이후 기아산업은 지난 1973년 국내 최초의 종합자동차 공장인 소하리공장 준공하고, 다음 해인 1974년부터 첫 승용차 ‘브리사 S-1000’을 생산했다. 브리사 S-1000은 일본 마쓰다의 패밀리아의 면허생산(라이선스) 모델이었지만, 출시 2년 뒤인 1976년 국산화율을 89.5%까지 끌어올렸다. 특히, 일제 엔진을 국산화해 경쟁 차종(현대자동차 포니, 제너럴모터스 코리아 카미나) 대비 기술자립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기아산업이 걸어온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80년대 자동차 산업 통폐합조치로 기아산업은 승용차 사업에서 강제 철수하게 됐다. 상용차 생산만 가능했던 시기에 기아산업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쓰다의 ‘봉고’를 면허생산했다. 다목적 승합차 봉고는 가족단위 고객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상공업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호응을 얻으며 출시 3년 만인 1984년 5월 누적판매대수 10만 대를 돌파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봉고 신화’를 써낸 기아산업은 1981년 순손실 266억원에서 이듬해인 1982년 순이익 39억원, 1983년에는 순이익 291억원을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1987년 2월에는 수출전략형 소형차 ‘프라이드’ 출시하며 승용차 시장에 복귀했다.

1990년 3월 ‘기아자동차’로 사명을 바꾼 기아산업은 1992년 9월 브랜드 최초의 고유모델 ‘세피아’, 1993년 7월에는 세계 최초로 도심형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스포티지’를 각각 출시하며 자동차 전문기업으로 입지를 다졌다.

1990년대 ‘소유-경영 분리 모범기업’으로 평가받던 기아차였지만, 오너십의 부재와 수년간 이어져온 분식회계, 무리한 사업확장과 외부의 경영권 공세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1997년 7월 ‘부도유예’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다.


채권단은 기아차에 대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고, 법원 결정에 따라 기업청산 또는 존속의 갈림길에 선 기아차는 생존을 위해 1998년 6월 국제입찰로 인수자 찾기로 결정했다.

정주영 창업회장의 결단에 정몽구 명예회장의 실행력을 더한 옛 현대그룹이 1998년 12월 1일 기아자동차 인수계약을 체결하면서 기아는 현대라는 새로운 울타리에 합류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회사 경영은 안정을 되찾았고, 1999년 카렌스·카니발·카스타 등 이른바 ‘쓰리 카 효과’ 앞세워 현대차가 인수한 지 1년 만에 흑자 전환, 2000년 2월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화성 EVO Plant East에서 생산 중인 PV5 [기아 제공]

화성 EVO Plant East에서 생산 중인 PV5 [기아 제공]



기아의 본격적인 성장은 정의선 체제에서 본격화했다. 정몽구 회장은 기아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정의선 당시 부사장을 2004년 말 인사에서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 내정했다.


회사의 최우선 개선 과제로 ▷기반 상실 ▷차별성 상실 ▷의욕 상실을 꼽은 정의선 사장은 2006년 독일 출신 세계적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고, 자동차 디자인의 혁신뿐 아니라 조직문화 개선에 이르기까지 기아 고유의 철학과 정체성을 새롭게 설계했다.

2009년에는 디자인 경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K 시리즈’를 출시했다. 준대형 K7을 시작으로 중형 K5와 소형 K3, 대형 K9 등 세단 라인업을 개편한 기아는 호랑이 코를 닮은 라디에이터 그릴, C필러를 지나쳐 트렁크까지 이어지는 크롬라인 등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정의선 호’의 혁신 경영은 멈추지 않았다. 2018년에는 본사 위주의 경영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역본부를 도입, 미주와 유럽 등 각각의 권역본부가 스스로 권한과 책임을 행사하는 구조로 전환을 꾀했다. 2019년부터는 인도 아난타푸르 공장에서 소형 SUV ‘셀토스’를 생산하며 인구 13억 시장에 안착했다.





자동차 산업의 대전환기를 맞은 2020년대 들어 기아차는 2021년 1월 15일, 사명을 기아자동차에서 ‘기아’로 바꾸고, ‘기아 대변혁(Kia Total Transformation)’의 첫발을 뗐다.

사명 변경과 함께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위주로 사업구조도 재편했다. 전기차(EV)는 플래그십 차종인 EV6·EV9뿐 아니라 대중화 모델 EV3, EV4, EV5까지 확장하며 전동화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울러 1980년대 다목적 차량 봉고의 헤리티지를 잇는 이용자 수요에 기반한 맞춤형 전기 PBV(목적기반모빌리티) 개발도 진행형이다.

기아 관계자는 “2륜 오토바이부터 3륜차, 4륜 승용차까지 80년 가까이 모빌리티 산업에만 전념했던 80년의 역사를 근간 삼아 앞으로도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에서 이동의 본질적 가치를 구현하고, 혁신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