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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야생은 따뜻했다, 여우와 나의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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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야생은 따뜻했다, 여우와 나의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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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퍼플렉시티에 한겨레가 “소설 ‘어린 왕자’를 반영하여 여성과 여우의 만남을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인공지능 퍼플렉시티에 한겨레가 “소설 ‘어린 왕자’를 반영하여 여성과 여우의 만남을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우리가 알다시피 ‘나’라는 단어는 각자 자기 자신에게는 우주에서 가장 힘이 센 단어다. 어쩔 수 없이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그런데 여기에 한 단어가 더 붙으면 어떻게 될까? ‘여우와 나’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캐서린 레이븐, ‘나’의 특기는 ‘사라지기’다. 아빠는 캐서린을 경멸했다. 그가 열두살 때 아빠는 말했다. “난 자식을 원한 적 없다. 니가 어떻게 되어도 알 바 없다.” 그는 열다섯살에 집을 나왔다. 아빠는 그가 대학생일 때 나타났다. 그러고는 학자금 대출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다. 아빠는 그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나’는 부모조차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배당했다.



여우와 나 l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북하우스(2022)

여우와 나 l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북하우스(2022)

그의 특기가 사라지기라면 취미는 걱정하기. “나는 식량과 주거를 위해 일하고 식량과 주거에 대해 걱정하는 데 그보다 많은 시간을 썼다. 나의 자유시간은 취미가 아니라 내가 추구하고 싶지 않은, 또한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장소에 있는 진짜 일자리를 위한 미완의 구직 신청서를 쓰는 일에 허비했다. 나의 취미는 걱정하기였다.” 그런 그에게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파트타임 하이킹 가이드, 오지 레인저가 직업인 그가 사는 오두막의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여우였다. 여우는 한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여우는 대략 오후 4시15분에 나타나서 평균 18분을 머물다 갔다. ‘나’는 외출했다가도 4시15분에 나타난 여우가 허탕 칠까 걱정하며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여우에게 얽히기 전에는 아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보질 못했다. 혼잣말하기 아니면 아무 말 하지 않기가 특징인 사람이 여우와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여우에게 ‘어린 왕자’를 읽어주기 시작했다. 여우는 자아에 영향을 미쳤다. 여우를 바라보면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 ‘나’의 취미는? 걱정하기→ 여우 사귀기.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없다→ 여우. 내 인생의 목적은? 안정된 수입원을 찾는 것→ 안정된 수입원 이외에 해야 할 의미 있는 일.



그런데 제정신인 인간이 과연 여우에게 ‘어린 왕자’를 읽어주고 함께 달빛을 즐기며 “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여우예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여우의 존재에 대해 비밀에 부쳤지만 결국 여우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익혀갔다. ‘여우’와 ‘나’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 ‘여우’라는 단어는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단어고, 경험을 진실되게 내놓고 그 경험을 우리와 공유하게 만드는 단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게 도와주는 단어, 예전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단어였다.



정혜윤 CBS 피디

정혜윤 CBS 피디

보이지 않게 짓눌려왔던 것에서 벗어나 경험을 진실되게 내놓게 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해방’일 테니 여우는 해방의 단어이기도 하다. 내 가슴도 삶을 만들어가는 강력한 힘의 단어, 해방의 단어를 필요로 하니 그런 단어를 가졌다는 것이 부럽다. 특히 야생 여우를 친구로 뒀다니 너무너무 부럽다. 책과 나, 고래와 나, 너와 나, 흑두루미와 나, 나무와 나… 이런 관계들을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에는 인생을 바꾸는 것과 상관있는 이름들이 가득한 것 같다.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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