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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너머의 펄 벅을 아세요? [육상효의 점프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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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너머의 펄 벅을 아세요? [육상효의 점프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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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고아들을 돌본 펄 벅 여사. 한국펄벅재단 제공

혼혈고아들을 돌본 펄 벅 여사. 한국펄벅재단 제공




육상효 | 영화감독



펄 벅은 1938년 장편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강 작가가 같은 상을 받은 때가 2024년이니 이보다 86년 앞서서 같은 상을 받은 여성 작가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3개월 만에 중국으로 와서 유년 시절과 사춘기 시절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그는 “출생과 혈통은 미국이지만, 이야기하는 법, 글 쓰는 법을 배운 것은 중국에서였다”고 말했다. 중국 문화에 깊이 공감했지만 친구들과 다른 피부색은 그의 사춘기 감수성을 예민하게 벼렸다. 18살에 공부를 위해 미국 대학에 갔을 때는 비슷한 모습의 친구들 속에서도 내면에 자리한 중국적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워했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 전체가 문화적 횡단이었다. 여러겹의 문화가 만들어준 다양한 정체성은 울림통이 큰 악기처럼 그의 영혼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평생 한 일은 글쓰기였다. 그는 80여권에 이르는 장편 소설, 단편 소설, 전기, 평론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국 전장시의 낡은 집 방에서부터, 말년에 마련한 미국 저택의 넓은 서재에서까지 그는 매일 글을 썼다. 그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이 경험한, 동서양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합했으며, 장애아 출산과 이혼 등의 힘겨운 일들도 객관화하며 극복했다. 중국 전장시, 유년의 작은 방에서는 연이은 형제들의 죽음을 견디기 위해서 글을 썼다. 그는 형제들을 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글쓰기라는 걸 깨닫는다. 미국 대학교 기숙사에서 그의 글은 자신의 내부에 자리한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도구였다. 이때부터 그의 글은 주변의 사람들을 묘사하는 문학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부임한 난징대학교 관사의 다락방 서재는 그가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게 된 장소였다. 그는 이 다락방에서 중국 시골에서 관찰한 농민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장편소설 ‘대지’로 완성했다. 중국의 어느 작가도 중국의 농촌에 대해서 그만큼의 객관적 눈을 갖지 못했으며, 서구의 어느 작가도 펄 벅만큼의 경험과 진정성을 가지고 그곳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 소설의 초판은 미국에서만 200만부가 팔렸으며 30개국의 언어로 번역됐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크게 성공했다. 다만 중국인 역할을 미국 배우들이 한 것은 편협한 서구중심주의적 연출이었고, 이는 펄 벅이 의도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



1934년 펄 벅은 중국의 혁명과 전쟁으로 생긴 혼란을 피하려는 타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했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글쓰기는 계속됐다. 자신의 육아 경험을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기록으로 묶어냈다. 세계적인 작가가 아니라, 한 장애아의 엄마로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기록했다. 다름은 결핍이 아니라 존엄의 또 다른 형태였다. 장애아를 키우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약자들과의 연대라는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해 나갔다. 미국 내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고, 재단을 만들어서 세계 각지에 흩어진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활동도 시작했다. 한국의 혼혈아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서 아예 재단을 만들어서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 결실로 경기도 부천에 희망원이라는 혼혈아동 보호시설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하였다. 박애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일이었다.



펄 벅의 ‘대지’는 예전에는 학생들의 교양 총서에 항상 이름이 올랐던 책이었다. 포스트모던 바람이 불면서 정통 서사형 소설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대지’를 다시 읽어보면, 지역의 삶과 여성의 현실을 보편적 세계관으로 확장하려는 그의 시선은 박경리와 박완서 같은 한국 작가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최근 부천에서 열린 펄 벅 국제 세미나에서는 그가 어린 시절 혼혈아동으로 돌봤던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제 노인이 된 그들은 예전 사진을 보며 펄 벅을 추억했다. 펄 벅은 부천에 머물던 시절에도 늘 글을 쓰던 어머니였다. 본격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에서 혼종된 정체성의 수용과 약자에 대한 배려는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 모든 걸 박애주의로 승화시킨 펄 벅의 유산이 소중하다. 그녀의 중국 이름은 새진주(賽珍珠)이다. 진주는 펄(Pearl)의 뜻을 차용해 만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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