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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 호랑이와 마주한 박정민… 잔혹한 인간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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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 호랑이와 마주한 박정민… 잔혹한 인간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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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빌런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외부의 적대자 또는 폭력성의 분신

편집자주

현실에선 피해야 할 상대지만 무대 위의 빌런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축입니다. 공연 담당 김소연 기자가 매력적인 무대 위 대항자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를 맡은 박정민이 퍼펫 캐릭터 리처드 파커와 연습실에서 합을 맞추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를 맡은 박정민이 퍼펫 캐릭터 리처드 파커와 연습실에서 합을 맞추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7세 인도 소년 파이는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표류 중이다. 캐나다로 향하던 일본 화물선이 침몰해 250㎏ 무게의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단둘이 구명보트에 남겨졌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리는 파커와 대치하는 파이의 얼굴에 두려움이 감돈다. 호랑이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육식 동물. 파이에겐 언제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악당이다.

무대 위를 누비는 건 육중한 맹수가 아니라 세 명의 퍼페티어(인형을 조종하는 사람)가 머리·심장·다리를 맡아 움직이는 플라스타조트(특수 스펀지) 호랑이다. 15㎏에 이르는 인형 틀을 덮어쓴 퍼페티어들이 표정 연기를 곁들이며 파커의 감정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자 파이를 맡은 배우 박정민의 위기감도 실감 나게 객석까지 전해졌다. 정교한 퍼펫의 움직임으로 호랑이라는 빌런의 존재감은 무대 위에서 금세 현실이 됐다.

캐나다 작가 얀 마텔에게 부커상을 안긴 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파이 이야기)'가 2012년 이안 감독의 영화에 이어 무대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2일 GS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인 호랑이 파커와 동행한 파이의 모험담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다. 2019년 영국 셰필드에서 처음 만들어져 2021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무대 연출 그대로 한국어로 옮긴 라이선스 버전이다. 한국 초연이자 영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첫 공연이다.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위협과 의존이 뒤섞인 기묘한 동행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공연은 멕시코의 병원에서 시작된다. 망망대해를 떠돌던 파이는 멕시코 해변에서 구조됐다. 보험 문제로 찾아온 해운회사 관계자 오카모토에게 파이는 표류의 경험을 두 가지 이야기로 들려준다. 하나는 호랑이 파커와 227일을 버틴 기적 같은 생존담이고, 다른 하나는 잔혹하지만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다. 퍼펫 파커의 시각적 경이로움에 익숙해질 즈음 공연은 관객을 퍼펫의 리얼리티 너머로 이끈다. 파이는 왜 이야기를 두 개로 나열하는가. 인간은 어떤 믿음을 통해 삶을 지탱하는가.

첫 번째 이야기에서 빌런은 호랑이 파커다. 파이의 가족은 인도 폰디체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다 정치적 혼란 속에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 이주를 결정했다. 파커는 동물원에서 길들여진 존재지만 여전히 야생 본능을 품고 있는 무서운 포식자다.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파커 외에 얼룩말과 오랑우탄, 하이에나도 타고 있었다.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그 하이에나는 파커에게 잡아먹힌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같은 사건의 인간 버전이다. 오랑우탄은 파이의 엄마, 하이에나는 프랑스인 요리사, 얼룩말은 다리를 다친 선원, 호랑이 파커는 파이 자신으로 치환된다. 결국 파커는 파이가 살아남기 위해 마주해야 했던 내면의 또 다른 얼굴이자 인간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심지어 첫 번째 이야기 속에서 파이는 파커 덕분에 살아남았다. 적대자와의 공존에서 오는 긴장감이 생존의 동력이 됐다.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다 들려준 뒤 오카모토에게 묻는다. "어느 이야기가 더 나으세요?" 파이가 힌두교와 이슬람교, 가톨릭을 동시에 믿는 소년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파이는 단 하나의 진실을 고집하는 대신 자신을 살아 있게 하는 믿음의 방식을 택하는 인물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선 호랑이 파커가, 두 번째 이야기에선 선원과 파이의 엄마를 해치는 요리사가 명백한 빌런이다. 파커가 파이 내면의 분신이라면, 요리사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잔혹함의 실체다. 파이는 오카모토뿐 아니라 관객에게 두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우리가 세계를 믿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누구에게나 있는 내면의 파이와 파커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공연은 뮤지컬 배우 박강현과 출판사 대표이자 작가로도 활동하는 배우 박정민의 더블 캐스팅으로 티켓 오픈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특히 박정민에게는 8년 만의 무대 복귀작이다. 박정민의 파이는 성인을 억지로 어린 소년으로 만든 캐릭터가 아니다. 몸을 낮추고 목소리를 끌어올리되 위기 상황에서 번뜩 드러나는 어른의 표정으로 파이의 복잡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믿음과 공포 사이를 오가는 미세한 표정 변화는 파이의 마음속 균열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생명이 없는 퍼펫에 생명을 부여한 퍼페티어들의 호흡은 이 작품이 말하는 믿음의 힘을 무대 위의 실제 경험으로 증명해 보인다.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박정민과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무대는 단순한 보트 세트에 머물지 않는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영상 이미지, 호랑이의 숨결과 파도 소리가 섞여 울리는 음향은 판타지 뮤지컬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한국 제작사가 연극 대신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별도의 장르명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이는 여러 믿음을 품는 소년이다. 그래서 그는 잔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보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선택한다. 퍼펫 파커를 움직이기 위해 퍼페티어가 굽힌 허리와 쓰지 않던 근육을 총동원하고, 파이를 맡은 배우가 2시간 가까이 무대를 떠나지 않은 채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극한 상황을 구현한다. 세 사람이 조종하는 '아날로그 호랑이'는 인간이 잔혹함을 견디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는 원작의 핵심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관객은 호랑이가 진짜가 아님을 알면서도 점차 그 존재를 믿게 되고 이 믿음의 경험이 곧 파이가 말하는 '더 나은 이야기'를 선택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내 안의 잔혹함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라는 작품의 질문도 여기에서 명확해진다.

이번 공연을 협력 연출하는 리 토니(Leigh Toney) 연출가는 "이 작품은 희망과 끈기, 인내, 그리고 선택을 다룬다"고 말했다. 파이와 파커는 누구의 내면에든 공존한다. 내 안의 두려움과 폭력성, 생존을 향한 본능적 충동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갈 것인가. 공연은 그 답을 더 많은 이야기와 더 강한 믿음에서 찾으라고 제안한다. 공연은 내년 3월 2일까지.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