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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의대 증원 2000명, 결국 주먹구구였나

중앙일보 주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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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의대 증원 2000명, 결국 주먹구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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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얼마 전 감사원이 발표한 의대 증원 추진 과정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감사원 보고서를 살펴보면 마치 한 편의 기괴한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지난 윤석열 정부가 큰소리쳤던 의대 증원 2000명의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에 주먹구구식의 황당한 셈법과 무리한 밀어붙이기가 윤석열 정부의 몰락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다.



감사원이 밝힌 의대 증원의 실상

‘과학적 근거’없이‘정치적 고려’

무리한 밀어붙이기 다시는 안 돼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024년 2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발표를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024년 2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발표를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구체적인 의대 증원 규모를 제시한 건 2023년 6월이었다. 이때 조 전 장관이 보고한 숫자는 500명이었다. 조 전 장관은 감사원 조사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400명 증원을 추진했던 것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은 “한 1000명 이상 늘려야 하지 않겠나”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조 전 장관은 넉 달 뒤 다시 보고했다. 이때 초안은 1000명이었다. 그런데 안상훈 전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대통령에게 혼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조 전 장관은 일단 1000명을 늘리고 3년 뒤 추가로 1000명을 늘리는 것으로 보고서를 수정했다. 그러자 윤 전 대통령은 “충분히 더 늘려라”라고 지시했다. 조 전 장관은 “‘충분히’가 어느 정도인지 고민에 빠졌다”고 토로했다.

그제야 복지부는 연구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증원이란 결론부터 먼저 정해 놓고 뒤늦게 근거를 찾는 식이었다. 복지부는 논문 세 편을 종합해 ‘2035년까지 의사 1만 명 부족’이란 추계를 끌어냈다. 하지만 복지부는 연구에 활용한 변수(의료기술 발전 등)가 달라지면 의사 부족 규모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애써 무시했다. 나중에 해당 논문 저자들은 한목소리로 “의대 증원 2000명에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감사원 감사에서도 “(복지부 추계는)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2023년 12월에는 이관섭 전 대통령실 정책실장 주재로 회의를 열었다. 이때까지도 조 전 장관은 ‘단계적 증원’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늘리면 의료계 반발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했다. 그런데 이 전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회의를 마친 뒤 조 전 장관을 따로 불렀다. 그러면서 “첫해부터 2000명을 일괄 증원하는 방향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2000명이란 숫자가 처음 나온 순간이었다.


그 후 조 전 장관은 윤 전 대통령에게 단계적 증원(1안)과 일괄 2000명 증원(2안)의 두 가지 방안을 보고했다. 이때 윤 전 대통령은 “어차피 의사단체의 반발은 있을 것”이라며 “정치적으로 봤을 때 2027년도에 추가로 증원하면 다음 대통령 선거 무렵이라 힘들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결국 정치적 고려에서 일괄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공식적으로 2000명 증원을 확정한 건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였다. 지난해 2월 6일 회의에선 위원 네 명이 2000명 증원에 반대 취지로 발언했지만, 조 전 장관은 “밖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서둘러 원안 가결을 선포했다. 애초부터 깊이 있게 논의할 마음이 없었고, 심의와 의결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의대 정원을 각 대학에 배정하는 단계에서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충북대는 의대 실습여건 평가에서 30점 만점에 18점으로 최하점을 받았다. 그런데도 전국 40개 의대 중 가장 많은 151명의 추가 정원을 배정받았다. 충북대는 2029년까지 충북 충주에 대학병원 분원을 설립하겠다고 했지만,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계획대로 진행돼도 2031년 완공”이라고 지적했다. 교육의 질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엿장수 마음대로’ 의대 정원을 나눠줬다는 얘기다.


지난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2000명 추진 계획은 우리 사회에 극심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다. 애초부터 2000명이란 숫자는 모든 혼란을 감내할 만한 ‘금과옥조’가 아니었다. 물론 의대 증원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분명한 건 의대 정원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정치적 고려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의대 교육의 질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대 교육과정이 부실하게 이뤄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는다. 국민은 실력 있는 의사가 많아지는 걸 원하지, 대충 학점을 채워 졸업장만 딴 의사를 만나고 싶은 게 아니다. 지난 정부와 같은 무리한 정책 추진과 사회적 혼란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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