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유럽의 성장 엔진’에서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독일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독일 중앙은행 총재의 경고가 나왔다. 요아힘 나겔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는 1일 연세대 특별 강연에서 “독일과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경제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며 “양국이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양국 모두 국가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공장을 돌리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 닮았으며, 이로 인해 대외 환경 변화에 취약하고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생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 나겔 총재의 진단이다.
제조업 강국인 독일은 2017년까지만 해도 유로존 평균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글로벌 수요가 둔화된 2010년대 말부터 성장률이 꺾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2년간은 에너지 가격 급등 등으로 인해 역성장했다. 자동차 등 주력 산업에서는 중국의 추격을 허용하며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연금재정 부담이 커지면서 재정수지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나겔 총재의 경고는 독일보다 더 큰 도전에 맞닥뜨린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2013년 기준)은 24%로 독일의 18%보다 더 높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독일이 70%인 반면 한국은 85%에 이른다. 그동안 우리 경제는 수입 에너지로 공장을 돌려 성공 스토리를 써왔다. 하지만 에너지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보호무역주의가 본격화하면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협받고 있다. 현재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한국 경제의 모든 주력 산업은 중국에 추월당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합계출산율은 0.7명으로 독일(1.4명)의 절반에 불과하다. 노동력 공급 부족이 눈앞으로 닥치면서 성장 잠재력 후퇴가 우려되는 실정이다.
특히 확장 재정의 한계를 지적한 나겔 총재의 경고는 뼈아픈 대목이다. 나겔 총재는 “공공지출 확대만으로는 장기적 성장 경로를 바꿀 수 없다”고 단언했다. 재정지출은 미봉책일 뿐 경제를 살리는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구조적 위기를 풀어낼 해법으로 불필요한 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이민정책 개혁 등 뼈를 깎는 구조 개혁을 제시했다. 이는 한국이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구조 개혁 대신 빚잔치로 연명하려고 한다면 독일이 걸었던 ‘역성장’을 피할 수 없다.
논설위원실 opinion@sedaily.com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